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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도록 담고 싶은 당신의 하루

작가가들려주는그림책이야기

by 행복한독서

순례 씨

채소 글·그림 / 44쪽 / 15,000원 / 고래뱃속



‘순례’ 씨는 저의 외할머니 성함 ‘순향’과 친할머니 성함 ‘상례’를 합쳐 만든 우리 모두의 할머니 이름입니다. 우리 할머니들의 모습을 쓰고 그린 책입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는 외할머니가 저를 키워주셨고, 학생 때까지 매년 여름, 겨울방학을 친할머니 집에서 보냈어요. 그래서 제게 ‘할머니’라는 존재는 친숙하고 늘 가까이에 있는 존재예요. 오랫동안 할머니를 가까이에서 보다 보니, 마음에 남는 할머니의 모습들이 쌓이게 되었어요. 할머니가 툭툭 내뱉는 짧은 말에도 온 생이 담겨있는 것 같아 제 마음에 남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말들과 모습들을 기록해두곤 했어요. 그런 기록을 모으고 모아 책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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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친할머니는 “죽을 날만을 기다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시면서도 매일 아침 고봉밥을 드시고 마을 한 바퀴를 걸으러 나가세요. “안 아픈 곳이 없다”고 하시면서도 손에 호미를 쥐시고는 매일같이 논밭일을 하러 나갑니다.

한평생 바라왔던 것들과 자신보다도 더 중요하게 여겨왔던 것들이 이제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고 느껴져, 인생이 부질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해가 뜨면 눈을 뜨고 다시금 의지를 내어 주어진 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할머니의 모습이 애틋하고 존경스러웠어요. 그런 할머니를 보면서 늙는다는 건 ‘먼 훗날의 비극이 아니라 그저 모습만 늙은 현재이고, 산다는 것은 어느 거창한 수식어가 필요한 무언가가 아니라 단지 주어진 하루를 살아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할머니의 모습을 통해서 늙는다는 것과 산다는 것에 대해 함께 이야기 나눠보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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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나오고 가장 먼저 할머니께 가져다드렸어요. 어쩜 자기를 이렇게 똑같이 그려놨냐며, 엄청 신기해하셨어요. 그러고 한 달 정도 있다가 할머니 집에 놀러 갔어요. 할머니 집에 친구분이 놀러와 계셨는데 그 할머니께서 “그 화가 손녀딸인가보네!”라며 제게 반갑게 인사를 해주시더라고요. 할머니가 친구분을 옆에 앉혀두고 자랑했었던 책을 또 보여주며 자랑하시는 모습을 봤어요. 평소에도 할머니가 책을 거실에 두고 오갈 때마다 책을 보고 또 본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런 할머니의 모습을 봤으니, 그걸로 이 책은 성공했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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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이 마냥 좋아서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그림책 출판사에 취직했어요. 그림책 디자이너로 3년간 일하다가 건강이 급격히 나빠져서 일을 관뒀어요. 잠시 쉬는 기간을 가지는 동안 할 일이 없으니 오랜 꿈이었던

‘내 그림책 한 권 만들어보자!’

싶어서 『순례 씨』의 첫 원고를 들고 다니던 출판사에 다시 찾아갔어요. 사람 일은 모르는 것 같아요. 회사에 작가님들이 올 때마다 제가 안내해 드리고 반겨드렸었는데 제가 작가로 회사에 가게 될 줄 어떻게 알았겠어요. 『순례 씨』 첫 원고에서 가능성을 봐주셔서 계약을 하게 되었고, 일했던 출판사와 함께 『순례 씨』를 만들게 되었어요. 이 책을 위해 어벤져스 팀이 꾸려졌다는 생각이 들 만큼 ‘잘 만들어보자’는 진심 어린 마음이 모여 이 책이 만들어졌습니다. 치열하게 함께 일해서 끈끈해진 사람들이 모여 이 책을 만들었기 때문에 책이 술술 잘 만들어진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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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준비했던 이야기였어서 그런지 많은 고민 없이 그림이 바로바로 그려졌어요. 커다란 하얀 도화지가 색연필로 가득 메꿔질 때까지 온 정성을 다해 힘을 주어 한 장 한 장 칠했어요. 저는 그림에 저의 감정과 에너지를 가득 담아내면 보는 사람에게도 그 감정과 에너지가 전달된다고 믿어요. 그게 저의 채색 기법이자 효과라고 생각해요.

아침 일찍 눈을 떠서 새벽까지 미친 듯이 그림을 그렸어요. 드디어 내 꿈을 이뤄가고 있구나 라는 생각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리게 되더라고요! 그리는 내내 정말 행복했습니다.



채소 작가는 오래도록 곁에 머무는 것들을 마음에 담고 그림 그리는 순간을 사랑합니다. 『순례 씨』를 내면서 그림책작가로 살아보겠다는 새로운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첫 책인 『순례 씨』를 시작으로 앞으로도 꾸준히 그림을 그릴 예정입니다.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3년 1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행복한아침독서 www.morningreadi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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