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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그 낯선 즐거움

주제별 어린이책 큐레이션 - 과학동화

by 행복한독서

김초엽, 듀나, 정세랑, 배명훈 같은 작가들이 이 말을 들으면 싫어할 수도 있겠다. 과학소설은 오락적 요소가 있다. 독자로서 나는 SF를 읽고 나면 즐겁다. SF가 현재를 성찰하고, 우리 안의 타자를 배려하는 문학적 손길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현실을 반영한 문학과는 다른 즐거움을 안겨준다는 말이다. 거칠게 말해 ‘뚜껑이 열리는 기분’이 든다. 우리는 쳇바퀴를 돌며 산다. 오늘 하루를 애써 견디고 그 하루로 한 달을 보내고 다시 일 년을 버티는 지구인의 삶이다. SF를 읽으면 단 한 번도 생각지 못한, 경험할 수 없고 느끼지 못한 낯선 경외감이 찾아온다.


오늘도 나는 이 작은 한국, 그중 서울하고 마포구, 산업 중에서도 극히 협소한 출판 분야에서 오해하고 잘난 척하고 무시당하며 산다. 이런 비루한 삶에 테드 창이나 김초엽의 SF가 찾아온다. 적어도 소설을 읽는 동안은 자기 연민에서 벗어나 우주적 통찰로 인식이 도약한다. 한 번도 꿈꾸어보지 못한 광대한 시야다. 작은 우물을 벗어나 바다로 나간 개구리가 있다면 이만큼 어리둥절하고 놀랍겠다. 마니아들이 꼽는 SF의 매력도 높은 산 정상에 서듯 시야가 우주적으로 확장되는 신비한 경험이다. 세계는 말할 수 없이 가까워졌지만 우리 삶과 관계는 더 협소해졌다. 1920년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읽어보면 주인공이 기차를 타고 중국과 러시아를 누빈다. 가슴에는 거대한 정의와 평화에 대한 소망이 담겨있다. 그에 비해 현대인은 스마트폰 영상을 보며 혼자 밥을 먹고 혼자 놀며 꿈이나 이상과 거리가 먼 삶을 산다. SF가 주는 장대함이 역설적으로 요청되는 시대가 아닌가 싶다.


읽고 나면 토론거리가 많은 SF

어린이책에서도 한동안 역사 동화와 탐정물이 봇물처럼 쏟아지더니 요즘은 SF와 미스터리가 인기다. 모두 장르문학이다. 다시 말해 고정된 이야기의 패턴을 지닌 작품들이다. SF가 수면으로 떠오르는 데는 이유가 있어 보인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로 인공지능이 우리 사회의 관심사와 위협으로 떠오른 지 몇 해다. 기계가 지적 노동마저 대신할지 모른다는 건 공상이 아니라 현실이 된 시대다. 테크놀로지가 발달된 미래의 이야기를 담은 SF는 4차 산업혁명을 겪고 있는 우리에게 가까운 현실이 되었다. 관심의 자장 안에 놓일 수밖에 없다. 또 스크린 훑어 읽기에 익숙해진 지금, 모두가 읽는 게 어렵다. 읽는다는 것이 낯설어진 시대, 이야기가 살아있는 SF는 상대적으로 읽기 쉬운 재미있는 장르에 속한다.

특히 어린이들을 위한 SF는 여러 장점이 있다. 읽기를 시작하는 혹은 과학으로 들어가는 문이 되어 줄 수 있다. 다만 과학동화는 대개 고학년용이 많다. SF의 소재가 외계인, 우주, 물리, 복제인간, 유전자, 인공지능, 로봇 등이라 4학년 이상의 인지 능력은 있어야 동화가 읽을 만하다. 하지만 읽기 훈련이 된 아이들이라면 중학년이라도 당겨 읽어도 좋다. 혹은 고학년인데 동화를 싫어한다면 SF로 문학의 재미를 북돋아 줄 수 있다. 과학을 질색하는 어린이에게도 SF로 흥미를 북돋아 줄 수 있다. 무엇보다 SF는 읽고 난 후 함께 나눌 이야깃거리가 많아 교사 입장에서 활용하기 좋다.


초등 2~3학년 어린이들이 가장 먼저 만만하게 읽을 수 있는 SF는 최영희의 『인간만 골라골라 풀』이다. 외계인의 침공에 맞서 어린이가 지구를 지키는 이야기다. 되돌아보면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가 사다준 『소년중앙』이나 『어깨동무』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건 외계인과 네스 호의 괴물에 관한 이야기다. 뿐만 아니라 「X-파일」같은 미드도 목을 빼고 기다리며 보지 않았던가. 최영희 작가는 꾸준히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위한 SF에 관심을 쏟아왔다. 『꽃 달고 살아남기』 같은 데뷔작이나 『슈퍼 깜장봉지』 같은 저학년 동화에서도 SF 마니아의 기질이 엿보이곤 했다.

(주니어김영사)인간만골라골라.jpg ⓒ주니어김영사(『인간만 골라골라 풀』)

『인간만 골라골라 풀』에 등장하는 외계인의 지구 공격이란 SF의 단골 소재지만, 동화는 이를 유머로 떠받친다. 주인공 풍이는 포켓몬 카드 모으기에 온 힘을 쏟는 평범한 아이고, 지구를 구할 박사는 ‘몸빼바지’를 입은 까치문구 할머니이며, 할머니가 만든 ‘동물언어 번역기’는 분홍색 시크릿 코코 목걸이다. 열 살 남자아이가 “샤르릉, 새르르르릉! 이제 넌 공주란다”라는 유치한 말이 나오는 목걸이를 걸어야 한다면, 아무리 지구를 지킨다 해도 사양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동화는 시종일관 유머러스하게 전개되지만 메시지는 확실하다. 외계인이 지구인을 공격하는 이유에 대해 함께 이야기해보기 좋은 동화다.


우주여행이 희망이 될 수 있다면

과학동화는 현실 과학기술의 발전을 반영한다. 1997년 복제양 둘리의 탄생으로 인류는 자신과 똑같은 유전자를 가진 복제인간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의 문을 열었다. 그러나 인간 복제는 심각한 윤리적 논쟁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진짜 인간의 수명 연장을 위해 복제인간 즉 클론이 만들어진다는 설정의 영화 「아일랜드」에서와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복제인간을 소재로 삼은 동화가 『복제인간 윤봉구』다. 스토리킹 공모전 수상작들이 그렇듯 자극적이고 첨예한 소재를 가져왔지만 이야기는 재기발랄하고 미스터리 요소까지 얼버무려져 속도감 있게 읽을 수 있다. SF가 낯선 아이들도 흥미롭게 읽을 만하다.

ⓒ비룡소(『복제인간 윤봉구』)

주인공 봉구는 형 민구의 복제인간이다. 뒤늦게 이 사실은 안 봉구에게 어느 날 “나는 네가 복제인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의문의 편지가 도착한다. 과연 누가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걸까. 위협이 봉구를 옥죈다. 한편 봉구는 짜장면을 좋아하는 절대 미각의 소유자로 중국집에서 견습생으로 일한다. 봉구가 짜장면 달인 진짜루 회장님과 일하는 대목도 마치 무협지처럼 흥미롭다.


최근 우리 사회의 최대 화두는 인공지능이다. 당연히 이를 반영한 동화가 있다. 이경화의 『담임 선생님은 AI』나 최영희의 『안녕, 베타』는 모두 인간을 대신하는 로봇에 관한 이야기를 그린다. 최영희는

“SF를 쓰는 가장 큰 즐거움은 새로운 세계관을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 그러나 그 세계를 스케치해놓고 보면 오늘 내가 속한 세상과 그리 다르지 않아서 어리둥절해 하곤 합니다”

라고 말한다. 작가가 그려낸 인공지능 로봇이 상용화된 시대를 만나면 예상치 못한 문제에 직면한다.

ⓒ창비(『담임 선생님은 AI』)

두 편의 동화에서 인공지능 로봇은 인간이 하기 어려운 궂은일이나 어려운 일을 맡는다. 그리나 역할이 끝나면 폐기된다. 이 지점에서 인간과 로봇 사이의 윤리가 제기된다. 또 새로운 계급사회의 도래에 대한 경고도 잊지 않는다. 아이들과 이야기 나눌 만한 좋은 토론거리를 제공하는 책들이다.


평행우주, 시간 여행 등 이론 기반한 동화

SF에서 빼놓을 수 없는 소재로 우주와 시간 여행이 있다. 이 분야의 고전적 동화는 매들렌 렝글의 『시간의 주름』이다. 그래픽노블로도 나왔고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우주의 공간을 마치 치마 주름처럼 접어 먼 거리를 짧은 시간 안에 갈 수 있다는 ‘시간의 주름’ 원리가 동화에 나온다. 자존감이 낮은 소녀 메그가 친구들과 함께 아버지가 잡혀있는 카마조츠 별로 향하는 이야기다. 우주여행에 대한 적당한 지식과 소녀의 모험이 어우러진 작품으로 이 분야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 필독서다.

ⓒ문학과지성사(『시간의 주름』)

『우주로 가는 계단』은 평행우주 이론을 기반으로 삼았다. 가족을 사고로 잃은 소녀는 무한히 많은 우주가 존재한다는 평행우주 이론에서 희망을 발견한다. 지금 소녀가 사는 우주에서는 가족이 죽었지만 다른 우주에서 가족은 예전처럼 살아있을지 모른다. 아파트 7층 할머니와의 만남이 이 소망을 구체적 미래로 만들어준다. 『시간의 주름』이 가족을 지키기 위한 소녀의 모험담이라면 『우주로 가는 계단』은 서정적인 SF다. 물리와 우주가 한 소녀에게 희망을 주고 살아갈 힘이 되어줄 수 있다니 가슴이 따뜻해진다. 동화 속에 나오는 고리행성이나 평행우주 이론, 스티븐 호킹, 『코스모스』 등을 찾아보면 훨씬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창비)우주로가는계단.jpg ⓒ창비(『우주로 가는 계단』)

여기까지 읽어낸 아이라면 어른들이 읽는 SF에 도전할 만큼 읽기 수준이 높아졌을 테다. 김초엽, 테드 창, 레이 브래드버리의 SF를 권한다. 이런 작가의 SF를 읽을 수 있는 독자로 이끄는 것, 그것까지가 먼저 읽기를 배운 우리의 역할이라고 나는 믿는다.


한미화_출판 칼럼니스트, 『아홉 살 독서 수업』 저자


이 콘텐츠는 <월간아침독서> 2020년 3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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