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실에서 만난 젊은 작가 - 안선화
여섯 살 아이가 선생님 손잡고 날마다 학교에 갔다. 할아버지 댁에서 방을 얻어 출퇴근하던 선생님은 아이 혼자 노는 것을 보고서 허락을 얻어 매일 데리고 다녔다. 군 생활을 하셨던 아버지가 근무지를 자주 옮겨 다니는 생활이다 보니 태어나면서 몸이 허약한 아이를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맡아서 키워주셨다. 학교에서 선생님들과 함께 있다가 퇴근할 때 돌아오는 일이 이어져 자연스럽게 다른 아이들보다 두 해 먼저 학교생활을 하게 되었다.
4학년 때, 이번에는 할아버지 댁에 중학교 미술선생님이 세를 들어오셨다. 커다란 캔버스에 여인들이 머리 감는 그림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선생님은 그림 재료를 주며 그리고 놀게 했고 중학교 1학년 다른 곳으로 가실 때까지 미술선생님을 따라 학교 미술실을 드나들며 계속 미술부 활동을 이어갔다. 3학년 때 미술선생님의 권유로 처음 유화물감을 써서 그림을 그렸는데 할아버지는 선생님 말씀이니 당연히 그래야 되는 것으로 알고 비싼 재료를 사주셨다. 고등학교 내내 미술실에 밤늦게까지 불을 밝혀주신 선생님들과 어른들의 배려가 있어 오로지 그림만 그렸다. 육남매의 맏이로 자라면서 집안 환경도 많이 달라졌다. 갑작스런 사고로 아버지를 일찍 여읜 뒤 원하는 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집안 형편에 맞추어가야 했다. 결혼과 함께 얼마간의 공백기가 있었을 때도 다시 그림 그릴 기회만을 기다리는데 때마침 88올림픽이 끝나면서 컴퓨터 열기가 달아올랐다. 새로운 것에 흥미가 있었던 그는 서울 창동역 인근에서 컴퓨터 학원에 다니며 PC의 세계에 들어갔다. 컴퓨터를 켜고, 전화선을 이용해 모뎀으로 PC통신에 접속하면 연결음이 들리고 이어서 간단한 메뉴 화면이 뜨는, 오직 흑백 화면에 글자만으로 이루어진 도스(DOS) 게시판이었다.
당시 일기 시작하던 PC통신 동호회는 하이텔, 천리안, 유니텔을 기반으로 속속 출현하였고 유니텔에서 동호회 활동을 이어갔다. 초기 온라인 세계에서 만난 전국 여러 지역의 미술 동호인들과 교류하며 그림에 대한 정보를 주고받고 중앙 일간지 후원으로 인사동의 갤러리에서 동호인 그룹 전시회까지 열었다. 이 동호회 공간은 그에게 그림책을 보여주는 동아리 활동으로 이어졌다.
1988년쯤부터 드나들기 시작한 종로서적은 그나마 집에 갇혀 지내던 그에게 숨통을 터주는 탈출구였다. 아직 우리나라 창작 그림책이 거의 보이지 않던 시절이었지만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그림책들을 보러가는 재미가 가장 큰 낙이었다.
2000년 전후로 여기저기 생겨나는 어린이서점도 아주 반가운 곳이었다. ‘까치와호랑이’에 이어 상계동에 자리 잡은 ‘이솝’ 어린이책방은 눈치 안 보고 그림책을 마음껏 볼 수 있게 해주었다. 결혼 후 늦게 태어난 아이와 책방 나들이하며 ‘그림책 읽어주는 동아리’를 스스로 꾸려서 보여주기도 하고 4~5세 또래 아이들이 직접 다른 아이들에게 들려주기도 하면서 점점 이 모임은 전국적인 규모로 커져갔다. 그러면서 주변에서 버려지고 쓸모없게 된 물건들을 모아서 조형 작업도 해나갔다. 이 모든 일은 특별히 계획한 것은 아니었지만 주변 사람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960년대 이후 출생한 소위 386세대 부모들은 학교교육 외의 다른 활동에 관심이 많았고 이런 창조적인 놀이에 충분히 갈증을 느끼던 때였다. 여기에 아이들과 함께 옛이야기를 들려주고 간단한 도구와 재료를 준비한 후 아주 간편한 팝업북을 만들게 하는 수업을 해나갔다. 어린 시절 조부모님이 잠들기 전에 꼭 들려주던 옛이야기, 비록 어렸지만 좋은 재료를 사도록 허락해주셨던 기억을 지금 아이들에게도 물려주고 싶었다. 심지어 청소년들도 지루해할 것 같지만 의외로 옛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었다. 그런 뒤에 팝업북 만들기에 들어가면 제각각 뜻밖의 재능을 발휘했다.
2004년 ‘정크아트’라는 개념을 알게 되면서 이 일에 더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림나무 고물상’이라는 블로그 활동과 함께 점차 재료의 범위를 넓혀갔고 동호회 사람들이 회화 전시 준비를 할 때 그는 아예 철망과 망가진 우산 등으로 공간을 전시 벽체에서 독립해 오브제로 확장해 나갔다. 그룹 회원들은 이런 작품 활동에 호응을 해주었다.
그의 활동 영역은 지역에서의 수업, 동호회 활동을 벗어나 차츰 거리의 현장으로 이어졌다. 2015년 서울 마포에서 열린 ‘와우북페스티벌’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일반 대중들과 버려진 책으로 작업을 하는 행위가 누구나 참여 가능한 흥미로운 일임을 모두에게 알린 행사장이었다. 이 작업을 눈여겨본 사회적 기업 상암포럼프로젝트는 같은 해 월드컵경기장 스카이박스를 작가가 오픈스튜디오로 사용할 수 있게 초청했다. 연간 사용 날짜가 많지 않은 경기장을 활용하여 VIP관람석을 작가에게 개방한 것이다. 3개월 조건의 대관 기간 동안 푸른 잔디가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팝업 작업을 하며 방문객과 함께 작은 팝업북을 만들어가는 체험 공간으로 변모시켰다. 이 활동으로 서울혁신파크 성과 보고회에서 발표를 하였다. 이런 작업 결과와 함께 뒤이어 서울도서관에서 열린 ‘친환경대전’에서 전시로 펼쳤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몸으로 부대끼며 현장을 누비고 다닌 결과에 대해서도 그는 여전히 몸을 낮춘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도와주었기 때문이라고.
그저 묵묵히 그러나 수없이 많은 곳에서 요청하고 이에 응하며 살아오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자원 재활용 환경 활동가로 알려졌다. 여기에는 많은 희생도 뒤따랐다. 제대로 된 비용과 대가를 고려하지 않고 작업하다 보니 명암이 엇갈리기도 했다. 덕분에 하고 싶은 대로 작업을 할 수는 있었다. 그를 업사이클링 팝업북 작가라고 말하는 데 명칭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오히려 ‘그림책을 새롭게 보기 위한 활동’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고 했다. 돌이켜보면 이 모든 행복한 여행은 부모님이 마련해주셨던 책들, 종로서적의 추억, 오스카 와일드의 『말하는 나무』에서 비롯되었음을 떠올린다.
그는 꿈을 꾼다. 인구 8,000명이 사는 작은 도시 몬터규에 있는 ‘북밀’이라는 방앗간 서점처럼 작지만 끊임없이 일할 수 있는 작업실을. 그런 곳에서 이제는 직접 그림을 그리며 그림책을 만들고 싶다.
정병규_행복한그림책연구소 소장, 『우리 그림책 작가를 만나다』 저자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1년 10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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