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들려주는그림책이야기
도시 가나다
윤정미 글·그림 / 44쪽 / 20,000원 / 향출판사
어릴 적, 제 교과서와 공책은 낙서장이었습니다. 교과서에 있는 글자들을 크고 반듯하게 공책에 쓰고 글자 선에 입체적으로 면을 그려 글자 놀이를 했었거든요. 그 글자들은 금세 큰 집이 되고 도시가 되어 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지루한 수업 시간에 이만한 상상 놀이는 없었습니다. 한적한 시골에서 살았던 어린 시절에 상상의 배경은 늘 도시였고요. 그림책 『도시 가나다』는 어릴 때부터 가졌던 글자에 대한 관심과 즐거웠던 도시 나들이의 모습이 담겨있습니다.
향출판사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를 통해 『도시 가나다』의 첫 더미가 싹을 틔웁니다. ‘그림책은 디자인이다’라는 주제로 진행된 수업에서 영감을 받아 첫 아이디어 구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수업에서 소개된 여러 그림책 중에 특히 대칭을 활용한 그림책 『기묘한 왕복 여행』은 제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들었습니다. 지극히 평범한 여행길이 기묘하게 바뀌는 순간이었어요. 한 가지 물체가 주변의 이미지에 따라 다른 물체로 보이는 것은 어쩌면 흔한 디자인일 수 있겠으나, 그림과 그림이 맞물려 이루는 이미지가 아닌, 글자와 그림들이 조화를 이루고, 그 그림들 속에 글자를 숨겨두면 재미있는 이미지가 나올 것 같았어요. 꼭꼭 숨겨둘 만한 장소가 많은 곳은 단연 도시였습니다.
어떤 글자를 숨겨둘까에 대한 고민은 없었어요. 제 머릿속에는 그저 가부터 하까지의 한글이었거든요. 어릴 적 처음으로 배운 한글이 바로 ‘가’였고, ‘하’는 마지막 글자이니 그림책에서 어렵다는 연결성에 대한 고민은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가에서 하까지 쭉 이어진 그림을 그리면 될 일이었습니다. 막상 첫 삽을 뜨고 나니 새로운 고민들이 몰려들었어요.
도시를 생각하면 대부분 부정적인 면을 먼저 떠올리게 됩니다. 인간의 욕심으로 끝없이 솟아나는 빌딩들, 사라지는 숲과 동물들, 점점 팽창하는 도시 속에서 숨이 턱턱 막힌다고 느끼기도 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도시로 몰립니다.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곳, 동시에 연대와 소통을 할 수 있는 익명성이 보장되는 공간이 도시입니다. 또 하고자 하는 일을 도시에서 부지런히 일궈갑니다. 양면성이 뚜렷한 도시의 모습을 저는 공평하게 다루고 싶었습니다. 도시의 배경들과 글은 그렇게 설정되었어요. 복잡하고 삐뚤빼뚤한 일들이 엉켜있는 도시 속에 잠깐 숨을 돌릴 카페 오아시스가 있고, 높다란 아파트 벽에도 지저귀는 새들과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빌딩과 자연, 사람들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도시의 활기찬 모습은 한 장면 한 장면 즐겁게 담기기 시작했습니다.
글자와의 관계도 그림에 중요한 장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자음 ‘가’에서 ‘하’는 모두 그림의 한 구성으로 이루어져 꼭꼭 숨겨져 있습니다. 글자 ‘가’가 숨겨질 첫 장면의 배경은 ‘가’로 시작되는 도시와 연관된 단어 ‘가로등’이 선택되고, 배경은 가로등이 그려진 이미지가 되어야 했습니다. 예를 들어 ‘가’는 가로등, ‘나’는 나무, ‘다’는 다리 등 각 페이지마다의 배경이 되는 요소가 정해지고 그 안에 글자를 숨겨두는 형태였어요. 글자로 바뀐 경기장과 아파트, 버스와 사람들, 지하철은 숨은그림찾기의 주인공이 되어 책 보는 재미를 더합니다. 우리 주변에 늘 존재하는 것들이 글자로 변신하려면 각각의 객체들이 뭉치거나 흩어지거나를 반복하고, 객체를 둘러싼 공간이 모두 포함된 프레임 안의 구도가 중요한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글자 ‘아’의 장면에서 동그란 작은 정원은 모음 ‘ㅇ’을 나타내며, ‘ㅇ’을 둘러싼 아파트의 구도는 ‘ㅇ’을 더 효과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책 여러 장면들은 실제로 제 경험들을 담아냈습니다. 아파트와 소공원은 삶의 공간이고 버스와 지하철은 일상의 교통수단입니다. 공간과 구도를 여러 번 바꾸는 작업을 통해 창밖의 풍경을 예사로이 보지 않는 버릇이 생긴 것 같아요. 아파트 옆 대형마트 주차장에 뚫린 네모 공간이 ‘ㅁ’으로 변하는 순간 제 작업실 창틀과 손잡이는 ‘ㅏ’로 바뀌어져 있습니다. 어릴 적 글자 놀이는 지금도 현재 진행형입니다.
살아가는 공간은 특별하지도 않고 심지어 지루해서 심심할 지경입니다. 하지만 고개를 잠시만 옆으로 돌려보면 신기하게도 새로운 공간이 보입니다. 그곳에는 숫자도 있고 글자도 있고 모든 것이 있지요. 저는 또 다른 무언가를 찾아내려고 주변을 살필 생각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공간에 사시나요?
윤정미 작가는 대학에서 의상디자인을 전공하고 오랫동안 직장생활을 하다가 늦은 나이에 그림책작가가 되었습니다. 쓰고 그린 책 『어느 멋진 날』 『소나기가 내렸어』는 각각 프랑스와 대만으로 판권이 수출되었습니다. 그 외 다수의 그림 작업에 참여했습니다.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2년 11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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