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별 어린이책 큐레이션 - 두려움과 용기
두려움과 용기가 동전의 양면이라는 걸 분명하게 깨달은 건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사자왕 형제의 모험』(일론 비클란드 그림 / 창비)을 읽고 난 후였다. 동화 속 겁쟁이 카알의 선택을 마주하며 용기 있는 사람이 따로 있지 않다는 사실을 절절하게 느꼈다. 기실 두려움과 용기는 한 몸일 뿐이었다. 이 사실 앞에서 몸서리를 쳤다. 어디 두려움과 용기뿐이랴. 인간의 삶은 빛과 그림자로 이루어져 있다. 빛인가 하면 어느새 그림자이고, 절정이라고 방심하자마자 추락한다. 찰나인가 싶은 순간에 영원이 있다. 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받아들이는 것이 삶이다. 세상은 두려움이 많은 자와 용기로운 자로 결코 나누어지지 않는다. 용맹한 사람도 두려워하며, 두려움에 떠는 사람도 용기를 낼 수 있을 뿐이다.
『사자왕 형제의 모험』에는 두 형제가 나온다. 동생 카알은 겁쟁이지만 형 요나탄은 용감하다. 집에 불이 나자 형은 몸이 약한 동생을 구하고 죽을 만큼 의롭고 용맹하다. 동생 카알은 죽어서 갈 수 있다는, 배고프지 않고 아프지 않은 낙원 낭기열라로 형을 찾아간다. 형제가 낭기열라의 벚나무 골짜기에서 다시 만나 잠시 행복을 누린다. 그러나 형은 이웃 들장미 골짜기의 사람들이 독재자 탱일의 지배를 받으며 고통스럽게 살자 그들을 도우러 떠난다. 겁쟁이 울보 카알은 가까스로 다시 만난 형을 기다리다 지쳐 찾으러 떠난다. 모험이 시작되는 것이다.
모험 내내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카알은 대체 용기를 어디에서 보여줄까 싶다. 마지막에 이르러 형은 사나운 용과 싸우다 용이 내뿜은 불에 맞아 사지가 마비되며 죽어간다. 동생 카알은 형을 살리고 더 이상 헤어지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그러려면 낭기열라에 살던 사람들이 죽으면 가는 이상향 낭길리마에 함께 가야 한다. 다시 말해 동생 카알은 움직일 수 없는 형을 업고 낭떠러지에서 떨어져야 한다. 그러면 함께 낭길리마에 갈 수 있다. 카알은 마지막까지 두려움을 떨쳐내지 못한다. 형을 업고 낭떠러지에 선 카알은 “늘 무서워. 하지만 해낼 수 있다고 믿고, 지금 해”라고 말하고 뛰어내린다. 카알이 겁쟁이 울보가 아니라 사자왕이 될 수 있었던 이유다. 이것이 내가 알게 된 용기의 비밀이다. 용기 있는 자는 따로 있지 않다. 카알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두렵지만 할 수 있다고 믿고 할 뿐이다.
어린이문학에서 용기를 주제로 삼은 이야기는 이렇듯 두려움이 많은 겁쟁이로부터 시작한다. 김유의 『겁보만보』(최미란 그림 / 책읽는곰)만 해도 그렇다. 늦둥이 외동아들로 태어나 ‘만 가지 보물’이란 뜻의 만보란 이름이 붙은 아이는 딱 한 가지 부족한 점이 있다. 사랑도 많이 받고 마음도 착한데 용기가 부족하다. 바람 소리만 나도 무서워하고, 뒤에서 발소리만 들려도 화들짝 놀란다. 보다 못한 옆집 아줌마가 말한다. “아이고, 맨날 코앞에만 내놓고 쩔쩔매는디, 애가 우는 소리 안 허고 배겨유?” 그리하여 부모는 만보를 혼자 시장에 보낸다. 하지만 시장으로 가는 갈림길에서 엉뚱한 길로 접어든 만보는 판타지가 섞인 모험을 한다.
대개 용기라는 주제는 중학생 이상이 읽을 만한 책에 등장한다. 『겁보만보』는 이 주제를 품은 드문 저학년 동화다. 떡할머니, 호랑이, 도깨비 등 옛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요소들을 가져와 변형하고 또 이야기 구조를 차용해 재미난 읽을거리가 되었다. 등장인물들의 사투리가 구수하여 소리 내어 읽기에도 좋다. 어쩌면 겁보는 어른들이 만드는 것일지 모른다. 분명하게 알 수 있는 두 번째 사실은 용기는 집 안이 아니라 길 위에서 만들어진다는 점이다.
중학년 정도부터 읽을 수 있는 『미오, 나의 미오』(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음 / 일론 비클란드 그림 / 우리교육)에도 카알처럼 두려움에 떠는 미오를 만날 수 있다. 역시 린드그렌의 작품이다. 『미오, 나의 미오』는 『사자왕 형제의 모험』이나 『산적의 딸 로냐』 등 작가가 후기작에서 보여준 선명한 주제 의식이 시작되는 환상동화다.
주인공 보쎄는 천덕꾸러기 고아다. 어느 날 머나먼 나라에 가서 꿈에 그리던 아빠를 만나게 된다. 그곳에서 미오라는 진짜 이름을 찾았고, 누구에게나 환영받는 아이가 된다. 하지만 머나먼 나라에도 슬픔은 있다. 바깥쪽 나라에 사는 잔인한 기사 카토가 아이들을 잡아가는 바람에 사람들은 비통함에 빠져있다. 미오는 카토와 대결하여, 아이들을 구하는 사명을 받아들이고 떠난다. 미오의 모험이 시작되었다.
흥미로운 건 악당과 대결해야 하는 미오가 영웅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다는 것이다. 미오는 수없이 망설이고 두려움에 떤다. “너무나 겁이 나서 내가 해야 할 일을 생각만 해도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고 울먹인다. 메아리로 돌아온 자신의 목소리를 비웃는 말소리로 들을 만큼 미오는 여리다.
이럴 때마다 미오는 길을 떠난 걸 후회한다. 아빠가 자신을 걱정하고 있을까 의심한다. 『사자왕 형제의 모험』에 나온 겁쟁이 카알과 판박이가 아닐 수 없다. 이런 미오가 주어진 사명을 완수할 수 있을까. 미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준 것은 무엇일까. 미오는 힘들고 겁나고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미오, 나의 미오!” 하고 부르는 아빠의 목소리를 듣는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아빠는 늘 “미오, 나의 미오!”라고 부르며 아들을 안아주고 다정하게 손을 잡아주었다. 그 소리가 마음으로부터 들려왔다. 신기하게도 아빠의 목소리를 떠올리면 미오는 자신이 혼자가 아니며, 사랑받는 아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었다. 이 믿음이 미오를 나아가게 했다.
두려움에 맞서는 세 번째 방법은 미오에게 배울 수 있다. 어려운 순간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용기를 낼 수 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지켜보고 응원하고 있다는 믿음이 우리를 두려움에서 용기로 나아가게 이끈다.
평범한 주인공이 용기를 내려면 액션 영화가 흔히 사용하듯 절체절명의 위기가 필요하다. 초등 고학년부터 읽을 수 있는 게리 폴슨의 『손도끼』(사계절)는 이점에서 액션 어드벤처 영화와도 같다. 시작하자마자 주인공의 목숨이 위태롭다. 브라이언은 캐나다에 사는 아빠를 만나러 단발 비행기를 탄다. 금방까지 대화를 나누던 비행사가 세상에나 심장마비로 죽는다. 브라이언은 간신히 살아남지만 비행기는 호수에 가라앉고 가진 건 엄마가 선물로 준 손도끼뿐이다. 이제 도시 소년은 홀로 살아남기 위해 은신처를 구하고, 먹을 걸 찾고, 곰을 만나 놀라고, 고슴도치 가시에 찔려 죽을 고생을 한다. 이런 무인도에서 살아남기는 이 작품 말고도 여럿이 있다. 『손도끼』가 흥미로운 건 한 소년의 탐험 이야기이자 동시에 완벽하게 자연의 일부가 되어 본능을 일깨우는 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무지막지한 모기떼의 공격을 받자 브라이언은 책이나 영화에서는 아름다운 경치와 야외 생활만 보여주었는데 야생은 그런 곳이 아니었다는 걸 알고 놀란다. 자연은 휴식이나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다. 살기 위해 먹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고, 감각이 몰라보게 예민해지며 보고 듣고 관찰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간다.
스콧 오델의 『푸른 돌고래 섬』(김종도 그림 / 우리교육)은 한 소녀의 모험담이다. 태평양 연안의 섬에서 수달 사냥을 온 러시아인과 원주인들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많은 사람이 죽고, 마을 사람들은 살 곳을 찾아 배를 탄다. 하지만 동생이 섬에 남았다는 걸 알고 소녀는 바다로 뛰어든다. 동생은 야생 개의 습격을 받고 허무하게 죽는다. 소녀는 아무도 없는 섬에 홀로 남는다. 나무를 잘라 집을 짓고 사냥을 하며 무려 18년 동안이나 혼자 산다.
『손도끼』가 소년 로빈슨 크루소의 이야기라면, 『푸른 돌고래 섬』은 소녀 로빈슨 크루소의 이야기라 할 만하다. 제국주의 시각에서 쓰인 『로빈슨 크루소』와 달리 두 작품은 약탈과 지배적 시각에서 벗어나 광활한 자연 앞에 선 인간이 생존을 위해 두려움을 무릅쓰고 자신도 몰랐던 가능성을 발견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동화 속 주인공을 만나면 두려움을 이기는 네 번째 비밀을 깨달을 수 있다. 인간에게는 자신도 모르는 용기가 있다. 아무런 희망과 가능성이 없을 때라도 자신을 믿고 무언가를 해나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한미화_출판 칼럼니스트, 『아홉 살 독서 수업』 저자
이 콘텐츠는 <월간아침독서> 2020년 9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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