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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는 옳다!

주제별 어린이책 큐레이션 - 추리소설

by 행복한독서

추리소설에 관한 추억이 있음을 이미 여러 자리에서 고백했다. 그만큼 또렷하게 기억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이었다. 어느 날 가슴이 딱딱해졌다. 겁이 났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이웃집 아줌마가 우연히 알고 놀렸고 나는 부끄러워 울었다. 지금도 상처를 받으면 안으로 문을 걸어 잠그는데 그때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 무렵 교실 뒤편 옹색한 학급문고에 있던 낡은 책 한 권을 읽기 시작했다. 가슴이 딱딱해진 것 따위는 모두 잊고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때 읽은 책은 셜록 홈스가 등장하는 「바스커빌가의 개」라는 장편 추리물이었다.

얼마 전 내가 읽은 책이 계림문고 중 한 권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책으로부터 모든 읽기가 시작되었다. 스무 살이 된 후 처음 사귄 남자 친구와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을 돌려 읽기도 했고, 2000년대 초반에 집중 소개된 일본 미스터리 소설을 읽으며 여름밤을 보내기도 했다. 늘 새로 나온 책들을 향해 떠나는 나의 읽기는 웬만해서 과거에 머물지 않는다. 그럼에도 추리·미스터리 소설은 예외다.


엉덩이 탐정 이후

내가 받았던 질문 중에 이런 게 있다. “엉덩이 탐정 다음에 무슨 책을 읽나요?” 스마트폰만 보던 아이가 『추리 천재 엉덩이 탐정』(이하 엉덩이 탐정)에 푹 빠져있으니 좋기는 한데, 그다음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하소연이다. 주인공 엉덩이 탐정뿐 아니라 조수인 브라운과 말티즈 서장의 인형까지 수집한 나 역시 『엉덩이 탐정』을 좋아한다. 그만큼 이 책을 재미있게 읽은 아이들이 성장하길 응원한다. 왜냐하면 나도 똑같은 경험을 통해 책 읽는 어른이 되었으니까.


『엉덩이 탐정』은 극장판 애니메이션도 나왔고, 만화에 그림책, 숨은그림찾기와 스티커북까지 출간된 하나의 트렌드다. 아이들은 왜 이 책을 좋아할까. 시리즈는 탐정과 조수, 경찰 그리고 의뢰인이 등장해 사건을 해결하는 전형적인 탐정물이다. 천재 엉덩이 탐정과 조수 브라운이라는 설정마저도 셜록 홈스와 왓슨 박사를 패러디했다. 어린 시절 탐정소설이 흥미진진한 이유는 무엇보다 목표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의문의 사건이 벌어지고 그 사건을 풀어가야 한다. 이 선명한 사건과 흥미진진함이 독자를 낚아챈다.

엉덩이탐정4-5p.jpg ⓒ아이세움(『추리 천재 엉덩이 탐정 9』)

도리어 내가 가장 의외였던 건 이제 글자를 막 읽기 시작한 8~9세 아이들이 『엉덩이 탐정』을 좋아한다는 사실이었다. 대개 탐정물을 즐기기 시작하는 나이는 4학년 이상이었다. 한데 『엉덩이 탐정』은 이 공식을 깼다. 이유는 책을 읽어보면 저절로 알게 된다. 『엉덩이 탐정』은 만화에 가까운, 그림이 있는 읽기 책이다. 카툰 스타일의 그림과 글이 사이좋게 이야기를 끌고 가니 읽기가 서툰 저학년 아이들이 만만하게 즐길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아이가 『엉덩이 탐정』을 좋아했다고 바로 내가 어린 시절 읽었던 「바스커빌가의 개」 같은 추리물을 권할 경우 실패할 수 있다는 뜻이다. 『엉덩이 탐정』으로 추리물에 흥미를 붙였어도 아직은 읽기 훈련이 좀더 필요하다. ‘위대한 탐정 네이트’ 시리즈처럼 글이 적은 읽기 책이 아직은 적당한데, 아쉽게도 이 책은 『엉덩이 탐정』만큼 흥미진진하지 않다. 아이가 글만 있는 두꺼운 추리물을 보고 기겁을 한다면 이때는 부모나 교사가 읽어주길 권한다.


스테판 파스티스의 『명탐정 티미』는 탐정 놀이에 빠진 티미가 주인공이다. 박장대소할 만큼 재미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페이소스까지 느껴지는 책이다. 친구인 구니가 핼러윈 날 받은 초콜릿을 잃어버리고 난 후 범인을 찾아달라고 명탐정 티미에게 사건을 의뢰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티미는 자신을 명탐정이라 여기고 추리를 하지만 그럴수록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다. 티미의 탐정 노릇은 읽다가 깔깔 웃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만큼 엉뚱하다. 하지만 티미가 왜 탐정에 집착하는지 그 마음이 헤아려지고 나면 마음이 짠하다. 그러니 이 책을 제대로 읽으려면 초등 3~4학년은 되어야 하는데, 이 경우엔 읽어주기가 답이다.


아이들이 탐정소설을 좋아하는 이유

탐정물은 갈등 구조가 뚜렷하다. 흔히 문학성이 높은 작품이나 고전으로 분류되는 동화들은 설명과 묘사가 많고 주인공 내면의 감정이나 숨겨진 이야기를 따라가느라 버겁다. 이와 달리 대개의 추리물은 좋은 편과 나쁜 편이 뚜렷하고 해결해야 할 과업도 분명해서 어린이들이 이야기 구조에 올라타기 쉽다. 어린이들은 사건이 벌어지고 나면 곧바로 범인을 찾는 이야기의 전개에 몰입할 수 있다. 한데 탐정이 위험에 처했다가 결국 사건을 해결하려면 이야기가 충분히 풀어져야 한다. 다시 말해 흥미진진하려면 장편이어야 한다. 그래서 초등 3~4학년이 탐정물을 읽는 적기다.

읽기 능력이 높은 저학년이나 3학년 이상의 아이들에게는 추천할 만한 추리물이 많아진다. 정은숙 작가는 추리 기법을 적절하게 사용한 동화를 지속적으로 선보이고 있다. 작가의 『댕기머리 탐정 김영서』는 처음 읽어볼 만한 추리물로 적합하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범인으로 몰린 아버지를 구하기 위한 영서의 활약이 펼쳐진다. 책 두께도 적당하고 무엇보다 역사 동화와 추리 이야기를 섞어놓아 생각할 거리가 많다. 여자아이를 주인공으로 삼아 과거 우리 여성들의 삶을 이야기해볼 수도 있다.

댕기머리탐정김영서20p.jpg ⓒ뜨인돌어린이(『댕기머리 탐정 김영서』)

아이가 어느 정도 읽기 훈련이 되었다면 전 열두 권으로 완간된 허교범의 『스무고개 탐정』 시리즈를 만나야 한다. 아이들에 따라 다르겠지만 처음 세 권까지만 읽어내면 그다음부터는 스스로 찾아 읽게 될 테다. 서구에서는 ‘해리포터 신드롬’이란 말을 종종 쓴다. 영상에 빠진 아이들이 매년 출간되었던 『해리포터』 시리즈를 통해 책의 재미에 빠진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지금도 많은 아이들이 『해리포터』를 통해 읽기의 세계로 들어간다. 비슷하게 우리도 『스무고개 탐정』을 따라 읽으며 자란 아이들이 생겨나지 않을까 기대한다.

허교범 작가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초등학교 시절에 교과서에서 어떤 내용을 배웠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읽은 책 중에서 어떤 책이 재미있었는지는 지금도 뚜렷이 기억에 남는다. 스무고개 탐정과 같은 나이에 읽었던 셜록 홈스 시리즈와 뤼팽 시리즈는 나를 추리소설의 세계에 매어 두었다.”

이처럼 무언가에 매었던 경험이 있느냐 없느냐가 평생 독자를 결정한다.


『스무고개 탐정』 시리즈는 추리물의 규범을 잘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린이책으로서 많은 장점을 지닌 책이다. 주인공은 스무 가지 질문을 통해 사건을 해결하는 스무고개 탐정이지만 명탐정의 활약만을 담았다면 소개하지 않았다. 스무고개 탐정과 갈등하고 대립했던 친구들이 이 시리즈의 모든 주인공이다. 처음 사건을 의뢰한 소심하고 까탈스러운 문양이뿐 아니라 도도한 함정의 여왕 주원이까지 스무고개 탐정과 협력하고 저마다의 장점을 살린 탐정이 되어가는 과정이 전편에 그려진다.

아이가 『스무고개 탐정』 시리즈 같은 책을 읽기 시작했다면 이제부터는 독립된 인격체로 대해주길 당부한다. 탐정 노릇이란 기본적으로 어른스럽게 굴고 싶은 마음의 표출이니까.

ⓒ비룡소(『스무고개 탐정 12』)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에리히 캐스트너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같은 작가가 쓴 탐정소설을 읽어보면 이런 마음이 잘 느껴진다. 아직은 어린이지만 어른이 놀랄만한 활약을 해내는 아이들의 모습 말이다. 캐스트너의 『에밀과 탐정들』과 린드그렌의 『소년탐정 칼레』는 탐정 동화의 고전이자 잘 쓰인 어린이문학이다.

초등 고학년에서 중학생이 되면 추리 기법을 활용한 청소년문학으로 읽기를 확장할 수 있다. 정은숙 작가의 『용기 없는 일주일』은 용기에게 빵셔틀을 시킨 제3의 인물은 누구일까 하는 충격과 궁금증으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 최나미 작가의 『아무도 들어오지 마시오』는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엄마의 핸드폰이 배달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과연 누가 이런 일을 했는지를 추적하며 비밀이 드러난다.

부모나 교사가 적절하게 이끌어주기만 한다면 추리소설은 고급문학으로 들어가는 열쇠다. 『스무고개 탐정』을 읽은 아이들이 나중에 김연수나 김영하의 소설도 읽는 법이다.


한미화_출판 칼럼니스트, 『아홉 살 독서 수업』 저자


이 콘텐츠는 <월간아침독서> 2020년 7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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