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별 어린이책 큐레이션 - 스포츠
나는 여자로, 그것도 운동을 못하는 여자로 살아왔다. 달렸다 하면 꼴찌고, 바람처럼 가뿐하기는커녕 뜀틀에 둔탁하게 걸리고, 던진 공은 얼마 못 가 떨어졌다. 어쩌겠나, 원래 나는 운동을 잘 못하는걸, 할 줄 아는 운동도 없는걸! 세상에는 스포츠맨도 있지만 책상물림도 있는 게 당연하다 여기며 평생을 살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웬걸 몸의 반란이 시작되었다. 원고지 50매를 쓰고 한 달을 앓았다. 그리고 찾아온 깨달음, ‘아, 나에게 몸이 있었지.’
축구를 보는 건 좋아하지만 ‘오랜 세월 인간은 안 모일수록 좋다라고 내심 생각해오던 초개인주의자’ 김혼비가 축구팀에 들어간 이야기를 담은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를 읽다가 이런 생각을 했다. 땀 흘리며 즐겁게 축구를 하고 야구를 하고 달리기를 하는 어린이들의 서사가 더 많아져야 한다고. 그래야 나같이 운동이라면 질색을 하고 운동 안 할 궁리를 하는 대신 어린이들이 몸을 움직일 때 맛볼 수 있는 즐거움을 알지 않을 텐가. 아마추어 여자 축구팀에 김혼비가 처음 간 날 선배 언니들이 호탕하게 웃으며 호언장담한다.
“첫 반년을 넘긴 사람들은 평생 축구 못 그만둬요, 이거, 기절해요.”
스포츠를 서사의 뼈대로 삼은 동화가 뭐가 있을까 궁리하며 맨 먼저 떠올린 건 『축구왕 이채연』(유우석 지음 / 오승민 그림 / 창비)이었다. 교사로 일하는 유우석 작가는 실제로 초등학교 여자 축구부를 맡았고 이 경험이 동화로 태어났다.
학교 게시판에 여자 축구부원을 모집한다는 공고가 나자 채연이는 친한 친구를 따라 축구부에 든다(실제로 아마추어 축구팀에 들어오는 많은 이들이 이런 우연을 거친다). 채연이 말고도 엄마가 아마추어 축구팀에 속한 신혜, 키가 크고 운동을 좋아하는 지영, 힘이 세서 팔씨름으로 남자아이들을 이기는 팔소연 같은 아이들이 하나둘 모여 든다. 채연이와 서먹한 사이로 지내는 소민이도 어쩐 일인지 축구부에 합류한다. 처음 축구 연습 시합에서 채연이는 수비를 맡거나 가만히 뒤에 서있었지만 차차 드리블을 배우고 패스를 연습한다. 초등학교 2학년 남자 축구부와 평가전도 하고 지역의 아마추어 여성 축구단 캥거루와 친선 시합도 한다. 캥거루 축구단의 공격수인 영미 이모가 멋지게 골을 넣는 모습을 보자 채연이는 부러운 마음이 뭉글뭉글 피어난다.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고 실력이 늘어가자 전국 학교 스포츠클럽 대회에 도전한다. 진짜 시합이 채연이를 기다린다.
이제 막 축구를 시작한 채연이와 친구들이 설마 우승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테다. 그래도 축구를 시작하기 전과 대회에 나갔다 온 후 채연이와 아이들에게는 변화가 생겼다. 여자 축구부 아이들은 친구 정도가 아니라 가족 같은 마음으로 끈끈하게 뭉쳤다. 채연이는 등을 졌던 소민이와도 화해했다. 모두 축구라는 팀 스포츠를 하는 동안 아이들의 내면에서 일어난 변화다. 처음 여자 축구부를 맡은 곰 선생님은 이런 말을 아이들에게 한다.
채연이와 소민이처럼 오해가 쌓였던 아이들도 혹은 경쟁 관계였던 아이들은 축구를 하며 개인에서 팀으로 변한다. 축구란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을 믿는 것, 열한 명이 한마음이 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스포츠이기 때문이다. 축구를 좋아하고 즐기게 된다는 건 채연이 말처럼 축구팀이 한 가족이 되는 일이다.
혹시 티볼을 아는지? 박상기의 『오늘부터 티볼!』(송효정 그림 / 비룡소)을 읽으며 처음으로 티볼이란 경기가 있다는 걸 알았다. 티볼은 야구와 비슷하지만 야구의 위험 요소를 없애고 팀워크를 강조하는 경기다. 무엇보다 투수가 없어 누구나 손쉽게 참여할 수 있다. 10명이 주전으로 뛰는데 이 중 5명은 여자 선수를 포함해야 하며 초등 체육 교과서에도 소개되어 있다.
작년까지는 스포츠클럽 대회에 피구로 참가했던 호정초 아이들이 올해 티볼에 참여하기로 한 데는 이유가 있다. 작년보다 학생 수가 더 줄어 전교생이 12명밖에 안 되는데 피구는 최소 15명이 필요하다. 그래서 6학년 담임인 고구마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12명이 참여할 수 있는 티볼을 하자고 한다.
동화는 티볼 선수로 참여하는 1루수 최세형, 2루수 송민지, 3루수 박예린, 유격수 강찬욱을 챕터마다 화자로 내세워 이야기를 끌어간다. 이런 구성의 장점이 있다. 아이들이 저마다 지닌 아픔과 고민 같은 속내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작은 학교에도 왕따가 있다. 하찮은 일로 따돌림을 받는 6학년 예린이가 당사자다. 또 늘 일등을 놓치지 않던 민지는 일명 천재 소녀라 불리는 라희가 전학을 와 주목받자 의기소침한다. 어떻게 해도 라희를 이길 수 없자 ‘스따’를 자처하며 아이들과 말을 섞지 않는 침묵 마녀로 산다. 중학생이 되기 전에 큰 학교로 전학을 보내려는 부모 때문에 고민이 많은 찬욱이와 부모가 이혼한 제연이와 세형이 남매의 이야기도 티볼을 중심으로 한 자락씩 펼쳐진다.
아이들 중에서도 잘하려는 마음이 너무 앞서 스스로를 학대하는 민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아팠다. 라희보다 잘하는 걸 만들고 싶어 티볼을 시작한 민지는 연습 벌레답게 성실하게 노력한다. 하지만 정작 경기에 나가서는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때마다 글로브로 자신의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친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티볼을 통해 조금씩 달라진다. 때로 민지처럼 어이없는 실수도 하고 경기에도 지지만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음 경기를 준비할 수 있는 힘이 스포츠를 통해 길러지기 때문이다. 성장하는 십 대들에게 스포츠가 꼭 필요한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가장 안전한 실패를 경험하며 굴레를 깨나가는 것, 이 과정을 겪어내는 호정초 아이들이 자랑스럽다.
스포츠를 주제로 삼은 작품 중에 이현의 『플레이 볼』(최민호 그림 / 한겨레아이들)과 김남중의 『불량한 자전거 여행』(허태준 그림 / 창비)은 빼놓을 수 없다. 『불량한 자전거 여행』을 읽어보면 김남중 작가가 얼마나 자전거를 좋아하는지 묻지 않아도 단박에 알 수 있다. 자전거를 사랑하는 사람 그래서 죽기 살기로 자전거 페달을 밟았던 사람만이 쓸 수 있는 희열과 고통이 작품 속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주인공 호진이는 부모가 이혼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작정 집을 나가 삼촌을 찾아간다. 한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뜻하지 않게 삼촌의 인솔하에 8명의 어른들이 11박 12일 동안 광주에서 속초까지 자전거 순례를 하는 여행에 합류하게 된다. 동화를 읽고 나면 독자도 같이 자전거를 탄 것마냥 혹은 운동장에서 전력 질주라도 한 것처럼 땀이 나고 고양감이 든다. 달리는 동안에는 아무 고민도 걱정도 없이 집중할 수 있다는 걸 알아가는 힘겨운 질주가 감동적인 작품이다.
『플레이 볼』은 구천초 야구부원인 동구의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단순한 스포츠 동화 이상의 메시지가 담겨있다. 지금까지 동구는 구천초 야구부의 주전이었다. 한데 천재 야구소년 영민이가 등장하며 투수도 4번 타자 자리도 모두 내어준다. 그리고 찾아오는 건 당연히 방황이다.
십 대가 된다는 건 그저 키가 자라고 몸무게가 늘어나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변화만 있는 것이 아니다. 유년의 시기를 벗어나 어른의 세계로 다가가면 본격적인 경쟁의 세계가 펼쳐진다. 지금까지 집과 학교에서 내가 최고라고 여기며 살았을지 몰라도 십 대가 되면 나보다 더 잘하는 친구와 경쟁자를 만나기 마련이다. 이때 찾아오는 열등감에 관해 이렇게 잘 풀어낸 이야기가 또 있었나 싶을 만큼 밀도가 높다.
야구뿐 아니라 지금껏 살펴본 축구, 티볼, 자전거 등 모든 스포츠에는 몸을 움직일 때만이 느낄 수 있는 기쁨이 있다. 축구왕 이채연이 말했듯
오로지 땀 흘리는 자만이 느낄 수 있는 희열이다. 축구든 야구든, 티볼이든, 자전거든 뭐든 좋다. 땀 흘리는 만큼 단단해진다.
한미화_출판 칼럼니스트, 『아홉 살 독서 수업』 저자
이 콘텐츠는 <월간아침독서> 2020년 11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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