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과 예술
미술에 대한 이야기를 말하고 쓰는 일을 업으로 하다 보니, 아이들과 함께 그림책을 읽다가도 직업병적으로 미술사적인 분석을 하게 되곤 한다. 그림책 역시 역사적인 시대와 장소, 문화적 환경의 산물인 만큼 배경에 대한 이해가 있으면 그림책과 작가를 보다 입체적으로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림책 속 미술사를 주제로 책방 마이북에서 강의했던 내용을 간단하게나마 공유한다.
한국이 사랑하는 작가 앤서니 브라운의 그림책은 특별히 그림책에 조예가 깊지 않아도 한번쯤은 접해봤을 만큼 매우 친숙하다. 전시, 연극, 뮤지컬 등 다양한 2차 콘텐츠로도 다채롭게 변용되는 브라운의 작품 세계는 서양미술사 자체를 주요 참고 문헌으로 삼는다. 바꿔 말하면, ‘교과서에서 봤던’ 시각 이미지들로 가득한 그림책이기에 대중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만한 문화 콘텐츠로의 가공이 용이하다고 할 수도 있다. 특히 『꿈꾸는 윌리』나 『미술관에 간 윌리』와 같은 그림책들은 ‘어린이들을 위한 서양미술사’ 교재로 활용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소위 말하는 ‘대가들의 명화들(보티첼리, 다빈치, 밀레, 고흐 등)’로 채워져 있다.
그렇다고 브라운의 그림책을 단순히 명화들이 많이 등장하는 패러디물 정도로 치부하는 건 곤란하다. 작가는 유비와 치환, 상징을 활용해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넘나들며 이미지가 가지는 심리적 에너지를 표출해내기 때문이다. 이집트 벽화, 로마 메달 장식에서 초기 르네상스 초상화로 이어지는 프로필(옆모습)을 활용한 인물 표현이나 비잔틴 수고본(manuscrit)을 떠올리게 하는 인물 배치, 중세 태피스트리(벽걸이 직조물)의 ‘천 개의 꽃’ 모티프가 눈에 띄는 배경 처리 등은 직접적으로 특정 작품을 다루지 않으면서도 독자로 하여금 서양미술사의 주요 장면들을 연상하게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브라운은 주인공들의 심리와 기억의 문제를 다루는 데 서양미술사를 적극 활용한다. 그림책 속 주인공 아이들의 불안하고 어색한 마음을 드러내기 위해 엔소르, 뭉크, 키리코를 소환하기도 하고, 자기 자신도 딱 부러지게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꿈과 같은 심리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달리와 루소가 동원된다. 『꿈꾸는 윌리』나 『너도 갖고 싶니?』 『달라질 거야』의 경우 마그리트를 위시한 초현실주의자들의 전략인 ‘낯설게하기, 비틀린 유비 관계, 본질화’를 적극 차용해 현실에 대한 불만과 환상 세계로의 도피 욕망을 표현한다.
브라운이 미술 이야기(미술사)에 기대어 이야기하고 싶은 건 결국 기억과 재현의 힘이다. 『행복한 미술관』 『우리는 친구』 『마술 연필을 가진 꼬마곰』 등을 통해 브라운은 각자의 이야기를 기록한 시각 이미지의 중요성을, 나아가 우리가 공유하는 기억을 보관하는 박물관의 가치를 전해준다.
앤서니 브라운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막스 뒤코스를 선택한 건 순전히 개인적인 취향과 관심 때문이었다. 대학에서 ‘유럽건축문화’ 수업을 진행하면서, 건축 테크닉이나 건축물의 형식에서 나아가 건축 ‘문화’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건 무엇일까 하는 고민과 맞닥뜨렸다. 그러던 중 우연히 아이와 함께 뒤코스의 그림책을 읽다가 ‘그림책과 건축 이야기가 만난다면?’이라는 즐거운 상상을 해보게 되었다.
건축은 지리적, 사회적, 경제적, 종교적 상황의 총체적인 산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건축의 문화사를 이야기한다는 건 건축물이 지어진 시대를 종합적으로 살펴보려는 시도와도 일맥상통한다. 그리고 이 작업은 무척 흥미로운 동시에 단순한 지식과 정보의 나열이 될 수 있는 위험도 지닌다. 그런 맥락에서 뒤코스의 교육적이지만 교훈적이지는 않은 작품들은 훌륭한 길잡이가 되었다.
『비밀의 정원』과 『비밀의 집 볼뤼빌리스』 『잃어버린 천사를 찾아서』와 같은 작품은 유럽 건축과 디자인 역사의 압축판이라고 해도 손색없을 만큼 디테일하게 살려낸 실재 건축물과 디자인 오브제들을 찾아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뒤코스의 일러스트레이터로서의 역량을 한껏 느낄 수 있는 그의 그림책 작품들 속에서 건축물은 단순한 서사의 무대나 배경을 넘어, 서사의 맛을 한껏 배가시키는 중요한 장치로 기능한다. 이야기의 힘을 중시하는 작가의 의도를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흔히 건축을 종합예술이라고 부른다. 글과 그림이 만나 새로운 층위의 의미를 생산해내는 그림책 역시 그러할 것이다. 뒤코스의 그림책 속 주인공들은 공통적으로 익숙한 공간에서 예상치 못했던 모험을 하게 되는데, 이때 로마 모자이크와 아치, 로툰다(돔과 원주가 있는 원형의 정자)와 프랑스식 정원 등은 배경인 동시에 사건의 또 다른 주인공이 된다. 짜임새 있는 서사 구조, 세부부터 전체까지 아우르는 정교한 묘사, 건축과 디자인, 문학과 회화, 조경과 연극 등 탈장르·탈경계의 미학을 풀어내는 뒤코스의 그림책은 그 자체로 하나의 탄탄한 건축구조물이다.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그림책작가를 그가 살았던 시대와 다각적으로 동기화시키는 작업은 작가와 그의 그림책에 새로운 맥락을 부여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그림책작가를 ‘그림책’ 작가의 틀에 가두지 않는 것 또한, 그림책작가 분석에서 주의를 기울여야 할 지점일 것이다. 1924년 영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찰스 키핑의 경우, 산업화를 겪은 대도시 런던과 그 주변의 다양한 모습을 자신만의 독특한 감성으로 담아냈다.
석판 일러스트 작업을 주로 한 키핑의 작업에서 무엇보다 눈에 띄는 부분은 그래픽적 구성으로 작가의 의도를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조지프의 마당』이나 『창 너머』와 같은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키핑이 사용하는 무늬와 질감, 색감은 묘사적이라기보다는 표현적이다. 적절한 균형감과 시각적 리듬을 선사하는 화면 분할에 고갱과 뭉크의 목판화를 연상시키는 형상과 질감이 더해진 키핑의 작품 세계는 예술의 진정한 목적은 감정과 감각의 직접적인 표현이라고 주장했던 20세기 표현주의 예술가들을 연상시킨다.
표현주의란 독일 비평가들이 자연의 모방을 거부한 여러 화가들의 작업을 설명하기 위해 1911년에 처음으로 사용했다. 미술사조로서 표현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 전후 독일(드레스덴, 뮌헨 등)의 젊은 예술가들 중심으로 일어난 새로운 예술 경향을 의미하지만, 보다 넓은 의미에서 표현주의란 뭉크에서 콜비츠에 이르기까지, 사회적이고 개인적인 혼돈과 억압을 거친 필치로 드러낸 작품을 일컫는다.
실제 키핑의 작품 세계에서는 직접적으로 죽음, 납치, 살해, 전쟁과 같은 폭력적인 장면들이 등장하기도 하고, 신경질적인 선묘와 극단적인 클로즈업을 통한 주인공들의 심리묘사가 강조되기도 한다. 하지만 키핑의 표현주의는 단순히 소재나 표현 기법만을 통해 찾을 수 있는 건 아니다. 키핑의 작품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반어와 역설로, 언뜻 보면 일차원적인 감정 표현인 것 같은 부분들을 깊이 들여다보면 세상에 대한 양가적이고 전복적인 그의 태도가 잘 드러난다. 앞서 언급한 『창 너머』를 비롯해 『낙원섬에서 생긴 일』 『길거리 가수 새미』와 같은 작품 속에서 죽음은 구원의 문제, 계급은 연대의 문제와 연결된다. 갈등과 억압을 전복시키는 강렬한 심리적 에너지, 그것이 키핑식 표현주의의 힘이다.
크빈트 부흐홀츠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가지게 된 여러 이유 중에 그가 대학에서 예술사를 전공했다는 사실이 꽤나 중요하게 작용했다. 시각적 경험이 지닌 엄청난 잠재력을 아낌없이 보여주는 부흐홀츠의 작품 세계의 기단부에 미술사에 대한 단단한 이해가 놓여있었으리라 막연히 추측해보는 혼자만의 놀이였다고나 할까.
몽환적이고 시적인 필치로 기이한 세상을 펼쳐 보이는 부흐홀츠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누구나 절로 ‘초현실’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된다. 『그림 속으로 떠난 여행』 『책그림책』과 같은 작품 속에서 우리는 꿈의 순간들, 몽상의 시간들로 초대받는다. 부흐홀츠의 그림은 우리에게 강렬한 기시감을 선사한다. 자연스럽게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가 떠오르는 이유는 부흐홀츠가 마그리트식 초현실주의의 전략을 적극적으로 차용하기 때문이다.
부흐홀츠의 그림 속에서 낯설게하기, 대립항의 병치, 다층적 경계, 감각의 전이와 같은 초현실적 장치들은 이야기, 여행, 인생에 대한 은유가 되어 시각적 진실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부흐홀츠가 보여주는 현실과 그 재현의 연약한 경계들과 마주하면서, ‘보이는 것을 믿는지, 믿는 것을 보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쇠라와 시냐크, 크로스를 중심으로 살펴본 부흐홀츠의 점묘법은 리히텐슈타인의 벤데이 도트Benday Dot와 롭 앤 닉 카터의 픽셀로 연결되어 작은 점들이 모인 세계를 구성한다.
『그림 속으로 떠난 여행』의 원제는 ‘순간 수집가(Der Sammler der Augenblicke)’다(1999년 국내에서 출판된 제목은 『순간을 채색하는 내 영혼의 팔레트』였다). 부흐홀츠의 그림책은 순간의 총합으로서의 생에 대한 커다란 오마주다.
소개한 네 명의 그림책작가들은 모두 빼어난 일러스트레이터들이기도 하다. ‘삽화’ 정도로 번역되는 Illustrate의 어원은 라틴어 Elucidate로 ‘빛나는 것이 되게 하다’라는 뜻이다. 그림책을 펴고 그림과 그림 사이를 읽는다는 건 시각 이미지의 구성과 리듬, 그리고 그들의 관계를 읽는 것이다. 그림책 속에서 만나는 미술사는 단순한 시각적 효과에서 나아가 일정한 주제 의식을 빛나게 하는 작가들의 힘을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박재연_예술사 연구자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19년 6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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