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들려주는 그림책 이야기
인간의 시간으로 AD 2050년에 이르자 지구환경은 극심한 오염과 온난화로 생물이 살기 힘든 행성이 되었고, 기아에 허덕이던 인류는 남아 있던 소수의 자원을 두고 세계대전을 일으킨다. 이로 인해 인류의 3/4, 인간을 제외한 지구 생물의 5/6가 사라졌다.지구의 파멸을 지켜보기만 할 수 없었던 우주평화단은 여덟 차례의 회의를 거쳐 지구 파괴의 주범인 인간을 멸종시키기로 한다.
-2053년 12월 30일 오후 4시 23분, 최후의 인간이 사망한다.
2053년 이후, 그 행성 이야기
조수진 글·그림 / 34쪽 / 35,000원 / 글로연
이 책의 시작은 ‘문’이었어요. 한국에서는 아파트와 빌라 등이 주거 형태 대부분을 차지하다 보니 거의 같은 모양과 색깔의 평이한 문을 통해 집으로 들어가잖아요. 거기에 익숙했던 저는 유럽에 가서 다양한 문에 홀딱 반하고 말았어요. 질감과 색감, 손잡이, 경첩, 심지어 노크하는 문고리까지. 어쩜 그렇게 다채롭고 예쁘던지요. 그래서 그 문들을 사진으로 담고 드로잉을 했어요. 그렇게 며칠을 지내다 보니 그 각각의 집에 사는 인물들을 상상하게 되더라고요. 커다란 구릿빛 사자 문고리가 달린 검정 철문 집에는 근엄한 법관 할아버지가 살 것 같고, 오래된 나무 궤짝에 쨍한 노란색 칠을 한 문 안에는 사이좋은 신혼부부가 살 것 같았어요. 그런 상상은 ‘문패 프로젝트’란 주제로 각각의 문패에 그곳에 살 법한 인물들을 더한 작업으로 이어졌어요. 그러다 상상 속 반인반수 캐릭터들이 사는 ‘코스모빌라’가 지어지고 그렇게 ‘코스모’라는 더미가 완성되었어요.
‘코스모’는 코스모빌라로 가기 직전에 마주하게 되는 커다란 쇠문이 책 덧싸개에 프린트된 아코디언 형식의 접이식 책이에요. 좌우가 뚫린 깍지 모양의 덧싸개에서 본책을 꺼내 펼치면 2미터가 넘는 길이의 기다란 낱장이 되지요. 그 전면부에는 코스모빌라의 전경, 또 후면부에는 코스모빌라 각층에 사는 인물들을 문패와 함께 표현했어요. 『2053년 이후, 그 행성 이야기』의 형식적 체계와 시각적 토대가 더미 ‘코스모’에서부터 구축되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코스모’를 가지고 2017년 볼로냐 국제어린이도서전에 가서 해외 출판사에 투고를 시작했어요. 긴 시간 공을 들인 화려한 시각적 요소로 가득 채운 책이라 출판에 자신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팅을 했던 모든 출판사에서 계약은 어렵다는 실망스러운 얘기를 들어야만 했어요. 접이책의 경우, 랩핑을 해서 유통을 해야 하는데 그러면 소비자가 이 책을 어떻게 확인하고 구매하겠느냐가 이유 중 하나였어요. 책을 출판하려면 끝까지 이들을 설득하고 이 책의 ‘가치’에 확신을 갖게 했어야 했는데 안타깝게도 전 오히려 쉽게 수긍 당하고 말았어요. 책의 시각적 요소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이야기는 밋밋하고 입체적이지 못하다는 걸 알고 있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 후로 한국에 돌아와 ‘코스모’를 일반적인 물성을 가진 책으로 바꾸는 작업들을 했고, 그런 일반적 형식의 더미를 몇 종류 만들기도 했어요. 그러자 원래 ‘코스모’가 가진 매력이 없어지고 책에 대한 저의 열정도 흐릿해져 갔어요. 심지어 나중엔 이 책을 꼭 만들어야 하나? 하는 생각마저 하다 그만 모든 걸 멈춰버렸죠. 아마 이때가 가장 힘든 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글로연 오승현 대표님을 만나게 되면서 다시 작업을 시작하게 됐어요. 글로연에서는 제가 어떠한 물성을 가진 책을 만든다 해도, 그 책의 제작이 어렵다고 해도 창작자가 원하는 대로, 딱 그대로 출판을 하겠다고 약속을 해주었거든요. 저와 이 책이 천군만마를 얻는 순간이었습니다. 동시에 ‘코스모’의 약한 내러티브에 대한 확실한 해결이 절실한 순간이기도 했고요.
그래서 2013년 만들었던 저의 또 다른 더미 ‘지구에서의 멸종의 역사’를 ‘코스모’ 더미로 소환합니다. ‘지구에서의 멸종의 역사’는 지구 밖에 존재하는 외계인이라 할 수 있는 다른 종족들의 시선으로 지구에서의 멸종 과정을 시간순으로 나열해 보여주는 형식입니다. 공룡을 시작으로 매머드, 모아새 등을 거쳐 과거 멸종의 역사와 현재 2000년대를 지나 2053년 12월 30일, 지구에서 인류의 멸종과 그 이후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2053년 이후, 그 행성 이야기』의 내용은 모두 여기에서 옮겨온 것이라 할 수 있지요.
두 권의 더미를 한 권의 책에 담아내니 이야기는 풍성해지고 견고해졌습니다. 하지만 코스모빌라의 주민과 멸종동물들을 한 장면에 담다 보니 이미지가 충돌해 시각적으로는 답답해지더라고요. 이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그림에 사용한 색들을 세 가지로 줄이고 셀로판지 안경을 활용하는 등 여러 시도를 해보았지만, 탁월하다고 느껴지는 적당한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또 어려운 결정을 하게 됩니다. 야광 컷을 추가하기로요. 야광이 더해지니 낮에는 보이지 않는 1695밀리미터의 페이지를 어둠 속에서 얻게 되었습니다. 이런 은밀함은 책의 매력을 높였고, 책 가격까지 높일 것 같아 걱정이 좀 되기는 했어요. 하지만 어둠 속에서 야광으로 나타나는 멸종동물들의 이미지야말로 멸종동물의 현재를 표현하는 데 더할 나위 없는 선택이었기에 밀어붙이자 다짐했죠.
마침내 완성된 책은 표지를 펼치면 코스모빌라라는 이름과 함께 8층의 외관이, 바로 아래에는 8층 실내의 모습이 동시에 펼쳐지고, 이런 형식의 반복으로 1층까지 다 내려가면 코스모빌라의 전경을 모두 조망하게 됩니다. 또 밤이 되면 짙은 코스모빌라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멸종의 역사’란 제목 아래로 지구상에서 사라져간 혹은 앞으로 사라질지도 모르는 생명체들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뒤 면지에는 별책 ‘오징어 박사의 연구 노트’가 부착되어 있습니다. 책 전체를 아우르는 세계관은 이 별책을 통해 비로소 만날 수 있으니, 『2053년 이후, 그 행성 이야기』의 온전한 감상을 위해서는 반드시 이 작은 책까지 보셔야 한답니다.
조수진 작가는 아름다운 지구에서 살고 있는 걸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거울책』 『달토끼, 거북이, 오징어』 『우진이의 일기』를 지었습니다. @jolly_book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3년 9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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