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선정 글·그림 / 40쪽 / 18,000원 / 향출판사
태양은 피하고 싶을 만큼 뜨겁고 낮은 길기만 하다. 해가 조금 수그러졌다 싶으면 장대비가 또다시 퍼붓는다. 견뎌야 하는 날씨와 견뎌내야 하는 일상이 힘겹게 이어지는 날이면 오늘과는 조금 다른 내일을 꿈꾸게 된다. 일상을 훌훌 털고 여행을 떠나거나 새로운 도전을 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길 꿈꿔본다. 이도 저도 할 수 없다면 책을 읽는다. 책 속에서는 현실에서 꿈꿀 수 없는 ‘판타지한’ 세상이 내 것이 될 수 있으니까.
그림책으로 만나는 판타지는 언제나 눈을 즐겁게 해준다. 화면 가득 펼쳐지는 새로운 세상, 도무지 혼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장면이 작가의 기발한 상상으로 활짝 펼쳐져 있다. 흥미로운 이야기에 정신없이 빠져들다 보면 어느덧 책의 마지막 장. 아쉬움에 책장을 맨 앞 장으로 다시 넘기게 된다. 『어느 날』 역시 그런 책이다.
표지부터 범상치 않다. 마치 식충식물이나 괴물 곤충 같은 존재가 건널목을 뚫어지게 들여다보고 있다. 건널목을 건너는 사람 ‘누구 하나라도 걸려라’ 하고 쳐다보는 것 같다. 책 넘김도 특별하다. 세로로 길게 펼쳐지는 책의 표지를 넘기면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이 앞 면지의 ‘건널목’이다. 펼쳐진 건널목을 보고 있으면 건널목 저편에 우리가 모르는 어떤 세상이 펼쳐져 있을 것만 같다. 말없이 그림만으로 독자를 판타지 세계로 초대하는 도입부이다.
이야기로 들어가면 아이 둘이 건널목에 서있다. 건널목 맞은편 아이가
그런데 그 친구는
그 순간 건널목은 이내 바다 냄새를 풍기며 출렁이기 시작한다. 평범한 곳, 평범한 장소, 평범한 일상이 흔들리고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는 순간이다. 일상을 깨는 순간에는 카타르시스가 생겨난다. 독자의 내면에 갇혀있던 답답한 감정들이 돌발적 충격으로 터져 나와 이야기 속에서 정화되는 것이다. 건널목 앞에 서있던 아이는 당황할 틈도 없이 꽈배기처럼 꼬이기도 하고, 가시처럼 뾰족해지기도 하는 건널목에 빠져버린다. 신기한 건널목 속에서 허우적대며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신비로운 경험을 하는 즐거움을 누린다. 독자 역시 그렇다.
그런데 이 모든 소란 속에서도 침착하게 소란을 잠재울 방법을 알려주는 헬멧 쓴 친구는 누구일까? 그가 누구든, 아마도 그는 우주가 흐르는 동네에서 펄럭이의 구슬을 제대로 사용하며 신나게 놀 수 있는 친구일 것이다. 대왕 문어든 대왕 새든 아랑곳하지 않고 알록달록 판타지 세상을 누비며 판타지 세상의 참맛을 알려줄 것이다. 그렇다면 그 헬멧 쓴 친구는 독자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는 그림책작가, 자신이 아닐까?
어쩌면 우리 동네 어딘가에서 만날 수 있는 건널목 한 귀퉁이에도 펄럭이의 구슬이 반짝이고 있을지 모르겠다. 뒤 면지에 남겨진 펄럭이의 구슬처럼 또르르 또르르 굴러다니며. 어느 날 우연히 어느 건널목에서 펄럭이의 구슬을 발견한다면 파란 헬멧에 낚싯대를 든 친구를 찾아 손을 꼭 잡자. 친구의 안내에 따라 알록달록 펄럭이의 친구가 되어 우주가 흐르는 동네에서 신나게 놀 수 있게 될 테니까 말이다.
최혜정_도담도담 그림책 숲 대표, 『어른의 삶으로 그림책을 읽다』 공저자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3년 9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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