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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그리고 인문학과 즐겁게 놀기

그림책 인문학

by 행복한독서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책이 그림책입니다. 하지만 그림책으로 인문학 이야기를 한다고 하면, 그림책을 ‘아이들이 주로 보는 책’ ‘육아를 위해 보는 책’으로 여기며 걱정 반, 의심 반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있습니다. 평생을 노력해도 알 듯 말 듯한 학문이 인문학인데 그림책 몇 권으로 인문학적 접근을 시도한다고 하니 걱정과 의심이 생길 수도 있지요. 그래서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그림책과 인문학에 대한 몇 가지 편견을 짚어보려 합니다.


먼저 인문학에 대해 생각해 볼까요. ‘인문학’ 하면 어떤 단어들이 떠오르나요?

어려움, 소크라테스, 고전, 철학 등의 단어들이 주로 언급되곤 합니다. 이렇게만 보면 인문학은 참 접근하기 힘든 분야 같아요. 하지만 인문학을 말 그대로 ‘인문’,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에 관한 학문으로 보면 어떤가요. 인간은 문학, 철학, 역사뿐만 아니라 미술, 음악, 심리학, 종교, 정치, 경제, 과학, 환경 등의 주체이기에, 인간이 관련된 모든 학문 분야가 인문학의 영역으로 포함될 수 있습니다.(『인문학은 밥이다』 알에이치코리아)

인문학은 훌륭한 인물의 일대기가 실린 책에서 배울 수도 있지만, K팝이나 SNS의 사진에서, 블로그의 짧은 글에도 담겨있는 셈이지요. 이러한 관점으로 인문학을 바라본다면 사람들의 일상과 의식, 희망과 꿈을 담은 그림책이 인문학을 이야기하는 좋은 매체가 될 수 있습니다.


정답 없는 질문 만들기

이제 그림책에 대해 생각해 볼까요. 유아기에 많은 그림책을 보던 아이들도 연령이 높아지면 자연스레 그림책을 접할 기회가 줄어듭니다. ‘책 = 학습 도구’로 여기고, 학년에 맞는 책만 읽어야 한다는 고정관념도 생기지요.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그림책이 가진 매력을 온전히 느껴본다면 금방 전환될 생각이기도 합니다.

저는 『중요한 사실』(마거릿 와이즈 브라운 글 / 최재은 그림 / 보림)을 자주 소개하는데요. 마치 전시회에서 본 것 같은 아름다운 그림에 리듬감 있는 글이 더해져 음미하며 읽기 좋은 책이지요. 숟가락, 풀, 사과 등 여러 가지 사물의 본질을 생각하다 보면, 나 자신의 가장 중요한 사실까지도 탐색할 수 있게 합니다.

책을 충분히 감상한 사람들은 이렇게 묻곤 합니다. “이 책의 주제를 유아들이 이해할 수 있어요?” 그럼 전 되묻습니다. “주제가 뭐라고 생각해요? 정말로 정답이 있을까요?”

그림4-ⓒ보림(『중요한 사실』).png ⓒ보림(『중요한 사실』)

책에는 정해진 답이 없습니다. 물론 인문학도 마찬가지지요. 그림책으로 인문학 수업을 진행할 때면, 책을 읽고 주고받는 이야기에 정답이 없음을 설명하거나 설득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정답은 없지만 질문을 만들 거예요”라고 덧붙이는데, 이때 참가자들은 도대체 이 수업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습니다. 도대체 정답이 없는 질문을 만드는 것이 인문학 수업에서 왜 필요한 것일까요.

우리는 살아가며 삶에서 수많은 문제를 만납니다. 그 문제들에는 정해진 답이 있는 경우가 거의 없지요. 다만 끊임없이 질문하며 치열하게 고민한 다음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에 따른 결과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있습니다. 다양한 삶의 모습이 담긴 그림책을 읽고 자신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다 보면 책 속 인물들의 입장과 상황을 이해하게 되지요. 그러면서 자신의 견해와 가치관도 정립하게 됩니다. 또한 나와 너, 그리고 우리 모두가 함께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열린 생각도 갖추게 되고요. 이 모든 것들이 차곡차곡 쌓여 단단한 내면을 만드는 것. 여러 갈림길에서 나의 선택을 할 수 있게 하는 것. 바로 그림책과 함께하는 인문학 수업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그림책 인문학 놀이

그렇다면 왜 굳이 그림책이냐는 의문이 생길 수 있을 텐데요. 그림책이야말로 삶의 전반에 통용되는 주제를 누구나 읽고 이해하기 쉽게 표현해 인문학에 최적화된 매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은 그림책을 학습의 도구로 여기지 않지요. 그래서 만만하게 여깁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만만하다’는 “부담스럽거나 무서울 것이 없어 쉽게 다루거나 대할 만하다”라는 뜻인데요. 만만하게 여겨야 마음껏 의심하고, 질문도 할 수 있습니다. 전 학생들에게 이 수업을 ‘그림책 인문학 놀이’로 소개합니다. 만만한 그림책을 보고 마음껏 생각을 펼쳐 인문학으로 놀아보라는 의미이지요.


초등학생과 함께한 수업에서 『수상해』(슷카이 글·그림 / 창비)라는 그림책을 함께 읽었는데요, 이 책에는 주위 사물들을 온통 수상하게 바라보는 호기심 많은 아이가 나옵니다. 매일 궁금증과 호기심으로 가득했던 우리의 어린 시절처럼요. 평범한 일상의 부분들이 사실 온통 수상한 것들로 가득 차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유쾌하게 그린 그림책입니다. 책을 보다 보면 페이지 구석에 있는 작은 그림 하나도 의심스러워지고요, 옆에 앉은 친구도, 선생님도 뭔가 이상한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저절로 질문이 마구 떠오르지요. 그림책을 읽고 수상한 것들을 찾으며 열띤 질문을 하던 3학년 친구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림책 한 권을 1시간도 넘게 읽은 우리 모두가 수상해!”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지요.

그림4-ⓒ창비(『수상해』).png ⓒ창비(『수상해』)

처음에는 단지 그림책 속에 수상한 장면들을 찾아봤습니다. 그러다가 서로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친구의 의견을 수용하기도, 비판하기도 하면서 그림책을 벗어나 우리의 삶 속으로 시선을 확장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평소에는 왜 이런 궁금증을 갖지 못했는지 고민도 해보고요. 수상한 점을 찾다가 알게 된 나에 대한, 친구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생각은 점점 자라나 아이들의 눈으로 바라본 정치, 환경, 세상에 대한 의견을 나누기도 하지요.

시작은 글이 적고 그림이 많은 짧은 그림책 한 권이었지만 수업 시간을 가득 채운 아이들의 질문과 생각은 그 어떤 책보다도 깊이가 있었습니다. 그림책을 선정할 때 나름의 목적과 수업의 방향성 등을 고려하긴 하지만 대부분 예상을 벗어나 진행되는데요. 이처럼 예상을 완전히 빗나간 수업에서 더 큰 재미를 느낄 때도 많습니다.

수업이 점차 진행되다 보면 참가자들은 정답 찾기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더는 정답 찾기가 의미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까요. 모두가 그림책과 인문학에 스며들어 질문에 집중하고 몰입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성장하지요.


소통하며 건강한 관계 맺기

인문학적인 가치는 책으로만 배우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생활에서 저절로 학습되기도 하지요. 그림책으로 만나는 인문학 프로그램은 대개 스무 명 정도의 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채워 가는데요. 다수의 참가자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중요한 시간이기에 참가자들이 부담감 없이 솔직하게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는 환경이 꼭 필요합니다. 나와 다른 방식으로 생각을 표현해도 비난받지 않으며, 각자의 입장을 존중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안전하게 생각을 펼칠 수 있지요. 보통은 상호작용 과정에서 습득되지만, 그림책의 도움이 조금 필요한 순간도 있습니다.


그림책 『핑!』(아니 카스티요 글·그림 / 달리)은 ‘관계 맺기’를 핑퐁, 즉 탁구에 빗대어 이해하기 쉽게 묘사한 책으로 여럿이 함께하는 수업에서 읽기 좋은 그림책입니다. 이 책을 충분히 읽은 후, 실제 상황에 대입하여 적용하는데요. 예를 들어 친구가 아끼는 물건을 내가 빌려달라고 하는 경우를 가정해 봅니다. 참가자들에게 이런 상황에서 친구에게 어떻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면 좋을지 작성하도록 한 다음, 함께 읽어보지요.

모두에게 주어진 상황은 같지만, 사람마다 생각을 표현하는 방법에 차이가 있고, 같은 말을 듣고도 느끼는 감정 역시 다를 수 있기에 굉장히 다양한 반응들이 나타납니다. 정중하게 말하려 노력했지만, 의도와는 다르게 듣는 사람은 불편함을 경험하기도 하고요. 성의 없이 말한 듯하지만, 목적과 의도가 확실하게 전달되어 괜찮다는 반응이 나오기도 합니다. 비슷한 감정을 느낀 참가자들끼리 집단이 형성되어 집단 내에서 동질감을 느끼고, 집단 간에는 차이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이러한 활동으로 참가자들은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는 방법, 타인의 응답에 대한 태도, 소통의 자세 등에 대해 고민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와 다른 사람들의 다름을 인정하고 건강한 관계를 맺는 기준을 갖추게 되지요. 그림책으로 인문학적 가치를 찾아가는 노력이 발현되는 순간은, 책에서의 깨달음이 행동으로 실천되고 현실에 반영되는 때입니다.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나에 대한 관심은 타인에게로, 그리고 우리에게로 연결되어 모두가 세상 속에서 함께하는 삶을 살아가게 합니다. 자연스럽지만 결코 저절로 되는 과정은 아니지요. 시도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림책은 가벼운 듯하지만 가볍지만은 않게 인문학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합니다. 낯선 놀잇감이 있다면, 일단 가지고 놀아봐야 재미가 있는지 알 수 있잖아요. 그림책 그리고 인문학으로 놀아보세요. 분명히 가까이 두고 자꾸 놀고 싶은 그림책과 인문학의 매력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그림책 한 권만 있으면 바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박수영_『그림책아, 인문학이랑 여행 갈래?』 공저자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3년 9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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