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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서 ‘두루두루’ 보는 것의 힘

by 행복한독서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

가와우치 아리오 지음 / 김영현 옮김 / 432쪽 / 22,000원 / 다다서재



시냇물 속에 홀로 고개를 내민 바위처럼 보이는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남자, 시라토리 겐지는 흰 지팡이를 짚고 다닌다. 그는 빛조차 보이지 않는 ‘전맹’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미술관에 가서 작품 감상하길 즐긴다.

시각장애인 시라토리 겐지는 어떻게 미술관 관람을 시작했으며, 어떤 방식으로 그림을 감상하는 걸까?

가와우치 아리오는 그와 함께한 2년 동안의 미술관 동행을 이 책에 담고, 다큐멘터리로도 만들었다. 시각장애인의 미술관 관람 안내는 어떻게 하는 걸까? 도록으로 공부하고 도슨트처럼 작품을 해설해야 할까? 저자는 아무 준비 없이 안내역을 맡았다. 그리고 시라토리 겐지와 물가의 조약돌처럼 바짝 붙어 서서 그림을 함께 ‘보기’ 시작했다.


“그럼, 무엇이 보이는지 가르쳐주세요.”

저자는 시라토리 씨에게 그림을 말로 설명해 주면서 점점 더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본 것을 말로 표현하자니 얼마나 궁색해지던지. 게다가 여럿이 그림을 본 경우에는 ‘눈이 보이는’ 사람이라고 해도 본 게 제각각이라는 걸 알게 됐다. 같은 그림이라도 어떤 사람은 풍경에 집중해 보며 남프랑스의 정취를 느끼지만, 인물에 집중한 사람은 유령 같은 표정 때문에 으스스한 기분에 사로잡힐 수 있다. 시라토리 겐지는 이렇게 누군가의 주관이 섞인, 직관적인 감상평들을 통해 작품을 즐긴다.


“사람마다 작품을 보는 방식이 다른데, 무엇을 믿고 무엇을 믿지 않을지 정하는 건 나니까 신경 쓰지 말고 자유롭게 얘기해줘”


그렇게 저자는 시라토리 겐지와 함께 보나르, 피카소 같은 전통적인 회화 작품부터 크리스티앙 볼탕스키의 설치 작품, 13세기의 불상, 하룻밤을 작품 속에 묵으며 경험하는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꿈의 집」까지 다채로운 작품을 감상해 간다. 책은 시각장애가 있는 사람과 함께 작품을 보면서 눈이 보이는 감상자가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감상, 더 깊은 이해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준다. 보이는 사람들은 시라토리 겐지와 함께 그림을 보는 경험을 통해 ‘본다’는 행위에 집중하고, 그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도움을 주는 쪽과 받는 쪽이 정해져 있다는 생각은 자연스럽게 뒤집힌다. 시라토리 겐지 ‘덕분에’ 스쳐 지나갔을 것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이 세상에 처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방식은 이렇다. 저자는 눈이 안 보이는 쪽을 약자로 규정하고, 배려하는 방식으로는 어렵다고 말한다. 그 보다는 시력이 있는 사람들도 모두 같은 것을, 같은 방식으로 보지 않는다는 걸 느끼는 경험이 더 힘이 있다고 알려준다. 미술관, 예술 작품 앞에서 시작한 대화로 감상하기는 보고도 보지 못한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저자는 일제강점기 조선인 징용 문제나 사회에 스며있는 우생 사상, 차별과 단절을 낳는 능력주의 같은 문제의식으로 나아간다. 미술관에서 나누는 대화에 그런 힘이 있다니! 책을 읽으며 확인해 보시라. 관음상처럼, “자애로운 눈으로 살아 있는 온갖 것을 두루두루” 볼 수 있다면, 그때 “인위적으로 그어진 인간 사이의 경계선을 뛰어넘어 모든 사람이 제각각 발하는 서로 다른 색의 빛”(230쪽)을 느낄 수 있게 되는지를.


이소영_책방 마그앤그래 대표, 『화가의 친구들』 저자


이 콘텐츠는 <동네책방동네도서관> 2023년 12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행복한아침독서 www.morningreadi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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