펭귄의 모험
김태린 글·그림 / 68쪽 / 15,000원 / 뜨인돌어린이
6년 전 겨울, 남극으로 가져갈 짐을 싸고 있었습니다. 세종과학기지 30주년 특집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 위해서였죠. 모자와 목도리, 마스크 등 방한용품을 챙기다 책장 위에 있던 조그마한 펭귄 피규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분홍색 코트를 입고 베레모를 쓴 모습이 전형적인 도시 펭귄(?)이었는데요. 문득 평생 도시만 경험한 녀석에게 남극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결국 분홍 펭귄은 제 주머니에 들어가 함께 남극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틈틈이 녀석의 여정을 사진으로 담아 두었는데요. 이것이 그림책의 씨앗이 될 줄은 그땐 정말 몰랐습니다.
정말 특별한 경험을 하고 나면 그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고 하죠. 저에게는 남극 출장이 그랬습니다. 눈과 얼음으로 덮인 하얀 대륙, 매 순간 다른 표정과 빛깔을 보여주는 하늘과 바다, 국경 없는 땅을 차지한 야생동물들, 시간이 아닌 날씨의 지배를 받는 일상, 그래서 계획한 모든 일정이 취소되어 버리면, 오롯이 현재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옴짝달싹할 수 없는 시간이 길어지고 스마트폰조차 쓸모가 없어질 땐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죠. 그렇게 세상의 끝에서 진짜 나를 만났습니다. 결국 한국으로 돌아와 다큐멘터리를 마무리하고 수십 년 해오던 방송일을 잠시 멈췄습니다. 그리고 막연하게 꿈꿔왔던 일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바로 그림책 학교에 등록하는 일이었죠.
『펭귄의 모험』은 SI그림책학교의 졸업 작품이었습니다.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이야기, 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바로 남극으로 간 도시 펭귄의 모험이었으니까요. 처음에는 반대도 있었습니다. 졸업 작품이라면 그간 닦아온 그림 솜씨를 발휘할 수 있어야 할텐데, 하얗고 파랗기만 한 남극은 배경으로 삼기에는 너무 단조롭고 또 심심하지 않겠느냐는 의견이었는데요. 하지만 제가 느끼고 경험한 남극은 그 어떤 곳보다 다채로운 빛깔로 가득한 장소였기에, 꼭 첫 번째 그림책으로 완성하고 싶었습니다. 그렇다면 색을 더 강렬하게 써보자는 선생님의 조언에 힘입어 본격적인 졸업 전시회 프로젝트가 시작되었죠.
수십 년간 방송과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가장 많이 신경을 썼던 일 중의 하나는 ‘팩트 체크’였는데요. 그동안 실제 사건들을 구성하던 작업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엉뚱한 상상을 하다가도 ‘이게 현실적으로 가능해?’라는 의문을 품는 날들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인공이 도시 펭귄이라는 사실만 빼고는 논픽션을 쓰는 건지, 픽션을 만드는 건지 헷갈리더군요. 내가 만드는 펭귄의 이야기는 판타지와 SF, 그 중간 어디쯤이라는 목표를 다시 설정하고 섬네일을 만들었습니다.
남극에 여름이 시작되는 12월, 산란을 위해 찾아오는 혹등고래, 산꼭대기에 둥지를 짓고 새끼를 키우는 자이언트 패트롤, 호시탐탐 새끼 펭귄을 노리는 스쿠아(도둑 갈매기), 해류에 떠밀려 온 크릴, ‘남극 조약’에 따라 연구 목적 이외에는 펭귄을 포함한 모든 야생동물과의 능동적 접촉이 금지되는 특수한 상황들을 스토리보드로 가져와 보니 드디어 ‘사건’이 생겨나고 진짜 ‘이야기’가 만들어지더군요. 이것이 바로 비행기를 타고 남극으로 날아간 도시 펭귄이 ‘여행’이 아닌 ‘모험’을 하게 된 이유일 겁니다.
제가 경험한 남극의 이미지를 직관적으로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지금의 그림체가 되었습니다. 사실적인 형태를 기반으로 채색을 할 때는 강렬한 색의 대비를 이용했는데요. 부드러우면서도 선명하게 색이 표현되는 과슈물감을 좋아했지만, 여전히 붓질은 서툴고 무엇보다 한 장의 그림을 완성하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려 컴퓨터 작업을 해야 하나 고민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강렬한 색감을 표현하는 데는 직접 칠한 물감만 한 것이 없다는 선생님의 말씀, 실수를 두려워하지 말고 더 과감하게 그려보라는 주변의 격려 덕분에 느리지만 뚜벅뚜벅 모든 그림을 수작업으로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초심자의 행운이 따랐던 걸까요? 더미북이 ‘상상만발 책그림전’에서 수상을 하게 되면서 제 이야기를 저만큼이나 이해하고 아껴주는 출판사를 만났습니다. 편집자와 디자이너의 애정 어린 조언과 따뜻한 격려 덕분에 더미북의 그림을 보강하고 추가해서 조금 더 밀도 있는 그림책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습니다. 서점의 유아 코너에 있지만, 이 책은 나이나 성별, 인간이나 동물에 상관없이 자연스러운 삶의 방향을 찾으려는 우리 모두를 위한 이야기입니다. 『펭귄의 모험』이 도심 속 정신없는 일상 속에서 ‘나 자신으로 살고 싶은 누군가’에게 다정한 용기를 주는 책으로 오래 함께하길 바랍니다.
김태린 작가는 오랫동안 방송 원고를 쓰다가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해 남극을 다녀오면서 삶이 바뀌었어요. 그림책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이야기를 엮고 그리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지요. 다큐멘터리를 만들며 취재한 사실을 바탕으로 엉뚱한 상상력을 더해 그림책을 만들고 있어요. 고양이 세 마리가 작업을 도와주고 있답니다.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4년 1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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