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들려주는 그림책 이야기 133
자, 맡겨 주세요!
이소영 글·그림 / 44쪽 / 16,000원 / 비룡소
이제 꽤 오래전 일이 되었지만 『자, 맡겨 주세요!』 이야기는 제가 프랑스에 체류할 때 기획하고 만든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 시작이 한국 독자들께는 다소 낯설 수도 있지만 용기 있게 풀어내 보려 합니다.
프랑스 마트에는 포장지에 AB라는 라벨이 붙은 제품들이 있습니다. 통상 ‘비오BIO(Agriculture Biologique의 약자)’라 부릅니다. 일종의 표준화된 유기농 마크라고 볼 수 있습니다. 2010년대 초반 건강과 환경에 대한 관심이 일상생활에 깊게 파고들며 이런 비오(AB)제품에 대한 관심이 늘었고, 자연스럽게 비오 제품이 증가하자 비오 제품만을 판매하는 상점들이 우후죽순 생겨났습니다. 당연히 비오 제품은 기존 제품보다 비쌉니다. 그러나 건강과 환경을 생각하면 비오를 먹어야 할 것 같은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냥 마들렌과 비오 마들렌을 양손에 들고 좀 이상함을 느꼈습니다. 정말 다를까? 밀가루, 버터, 소금, 설탕을 유기농 제품으로 사용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여전히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공장에서 제조하고, 비닐 포장지를 쓰고, 마트에 운송하기 위해 경유를 사용하는 화물트럭을 불렀을 것입니다. 크게 다르지 않다면, 결국 더 많이 팔기 위해 방식만 바꾼 건 아닐까? 건강에 대해 높아진 관심과 우려를 이용한 교묘한 자본주의적 상술이 아닐까? 음모론일지도 모릅니다.
삶의 방식과 소비 행태까지 모두 바꾸어가며 지구와 환경을 위하는 실천가들이 있습니다. 동시에 부지런히 비오 제품을 소비하며 건강을 챙기지만 여전히 편리함에 기대어 효용만을 좇는 생활 방식을 고수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는 후자가 아니었다고 단호하게 말하지 못합니다. 건강을 위한 마케팅과 자본주의 상술에 휘말리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는 구매하지 않고 살 수 없는 도시인이지만 과한 소비는 그만큼의 쓰레기와 탄소를 만들어냅니다. ‘편리’와 시간 ‘절약’을 위해 많이 애용하는 배송 또한 실로 엄청난 양의 쓰레기를 토해냅니다. 배달은 코로나 이후 이제 삶의 일부분이 되었지만 배송을 위한 포장으로 비닐과 플라스틱, 스티로폼이 하루 만에 쓰레기통을 가득 채웁니다.
남편과 이런 이야기를 하다 문득 비오에 대한 풍자를 하고 싶었습니다. 비오 제품 선호 이면에 드리운 우리의 이중성, 그러니까 건강에 대한 높은 관심과 대비되는 지구 건강에 대한 관심을, 그리고 비오 제품의 구매가 직간접적으로 환경을 해치는 우리 소비 행태의 면죄부가 될 수 없음을, 비오는 인간이 지구와 생태계를 위한다며 만든 제도이지만, 자연을 존중하는 제조 방식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어쩌면 또 다른 욕망에 기반해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한 다른 형태의 자본주의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자, 맡겨 주세요!』는 비오스럽게 지구의 문제를 해결하는 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기획되었습니다. 하지만 비오스러운 인간의 해결법은 AB 사전적 정의와는 달리 너무 자본주의적입니다. 계속 기발한 아이디어로 무언가를 제조하고 발송하는 방식입니다. 인체에 무해한 성분으로 만들어진 수면제, 친환경 염색약, 먹어도 되는 산소통, 유기농 바다표범 엑기스 등 결국 인간들만이 할 수 있고, 인간의 시스템 안에서만 쓸모 있는 해결책입니다.
지구 입장에서 우리 인간이 얼마나 하찮고 또 건방진 종인지 처지를 바꿔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1만 2천 년 전, 99퍼센트의 야생동물과 1퍼센트의 인간과 가축이 살았다고 합니다. 현재는 3퍼센트의 야생동물과 97퍼센트의 인간과 가축이 살고 있으며, 이 중에서 32퍼센트가 인간입니다. 오직 한 종만 32퍼센트인 셈입니다. 지구의 입장에서 본다면 과연 인간은 보존 가치가 있는 종일까요? 이미 지구는 다섯 차례나 종을 멸종시킨 바 있습니다.
이제 좀더 과감하게 환경에 대한 시각을 바꾸고, 현재 인간 삶의 모습을 다소 불편하게 되짚어 볼 필요도 있습니다. 해열제는 아픈 ‘사람’에게 줘야 합니다. 아픈 ‘지구’에게는 이제까지 우리가 누린 걸 희생해서 되돌려줘야 할지 모릅니다. 이런 취지에서 이번 그림책 『자, 맡겨주세요!』를 모두 ‘디지털’로 작업했습니다. 처음으로 종이를 소비하지 않은 작업이었습니다. 물론 그만큼 전력을 사용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원화도 없는 이 그림책이 ‘지구’ 입장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작은 것이라도 함께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책이 되길 바랍니다.
이소영 작가는 한국과 프랑스를 기반으로 『힘내, 두더지야』 『괜찮아, 나의 두꺼비야』 『안녕, 나의 루루』 등 다수의 그림책을 출간하였습니다. 그리고 동화책과 그림책에도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4년 2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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