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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독서 Jun 26. 2024

노인경과 함께 반짝이기

한국 그림책작가의 세계 - 노인경

그림책작가 노인경이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선 계기는 2013년 『코끼리 아저씨와 100개의 물방울』의 BIB 황금사과상 수상이었다. 간결한 흑백 선에 물방울의 부드러운 파란색이 환하게 눈앞을 밝혀주는 그림은 남다른 집중력으로 독자를 잡아당겼다. 머리에 자식들을 위한 물이 가득 담긴 양동이를 인 채 자전거를 타고 멀고도 험한 길을 달리는 코끼리의 서사는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치열하게 하루를 살아내는 아버지의 모습을 가슴 먹먹하게 떠올리도록 만들었다. 그런 감성의 환기가 우리만의 것은 아닌 듯, 이 책은 중국, 프랑스, 스페인, 아랍에미리트 등 각 대륙으로 진출했고, 지금도 상담이 활발하다.


2024년 볼로냐 국제도서전에서 강연을 마치고 인터뷰 자리에 마주 앉은 노인경은 『코끼리 아저씨와 100개의 물방울』의 그림처럼 간결하면서도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왜인지, 나는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던졌다. “작가로서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대답은 ‘나는 모으는 사람이다. 나는 반짝이는 순간을 모은다’였다. 2012년 볼로냐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선정되게 한 『책청소부 소소』의 캐릭터, 소소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소소는 이 책 저 책에서 청소기로 빨아들인 이런저런 낱말들을 모은다. 대부분 책들이 불평하며 치워주기를 요구하는 상황이다. 낱말로서는 서러운 일이고 책으로서는 무정한 일이다. 하지만 소소는 모은 낱말들과 신나게 놀다가, 책에게 되돌려주며 새로운 역할을 찾아준다. 그런데 인터뷰 뒤에 다시 그 책을 들여다보니, 소소가 모아놓은 낱말을 벽에 붙여놓은 장면들에서 가장 눈에 잘 띄는 단어가 ‘반짝반짝’이다. 아, 노인경은 반짝이게 만드는 작가로구나. 맥락에서 떨어져 나온 일상의 한순간, 책 속의 한 낱말을 건져 올려 빛을 비춰주고 다른 자리로 옮겨 심어, 반짝이는 새로운 맥락을 만들어내는 작가로구나.

그러나 그 반짝임은 마냥 천진하고 순조로운 빛의 튕김은 아니었다. 2015년 독일 화이트레이븐 도서로 선정된 『고슴도치 엑스』(2014), 프랑스와 대만 등으로 수출된 『곰씨의 의자』(2016)는 반짝임의 씨앗이 밀쳐지고 눌리며 힘겨운 시간을 오래 보낸 다음에야 터져 나오는 과정을 보여준다. 고슴도치 엑스는 뾰족한 본성을 순화시켜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에 시달리고, 곰씨는 작은 호의에서 비롯된 관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며 일상을 잠식당하는 괴로움에 시달린다. 순응해야 한다, 조화로워야 한다, 너그러워야 한다는 공동체의 덕목에 숨죽인 채 눌려있어야 하는 개인의 여유와 개성의 자유를 향한 시선이다.

결론은 물론 해피 엔딩이다. 책에서 길을 발견한 고슴도치는 자신의 가시를 갈고닦아 ‘올올이’ 탄탄히 세운 뒤 벽을 뚫고 밖으로 나가는 데 성공한다. 기분 좋은 흙길을 걸어 들어간 숲속에서는 ‘잎사귀마다 햇빛이 반짝거’린다. ‘햇살이 눈부신 날’ 자신의 의자에서 시를 읽고 음악을 들으며 평화롭게 살던 곰은 지나가던 피곤한 토끼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가 그 둘이 결혼한 뒤 줄줄이 낳는 아기토끼들에게 의자를 점령당하고 만다. 어떻게든 자기 자리를 조금이나마 확보하려 애를 쓰지만 점령군은 늘어만 가고, 결국 곰씨는 담아두기만 했던 말을 터뜨린다. 그동안 힘들었다, 나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가끔은 혼자 있고 싶다, 제발 내 꽃 좀 소중히 다뤄달라…. 그 말을 하는 데도 ‘커다란 용기’가 필요했던 곰씨는 기진맥진, 곯아떨어진다.


이건 모두 노인경 자신의 이야기다. ‘깊어지는 관계 속에서’ 싫다는 말을 하고 싶지만 그럴 기회도 없었고, 지금도 하지 못한다는, 곰 같은 자신. 

“모두 온전히 내 이야기예요. 첫 번째 책 『기차와 물고기』(2006)도 남자친구와 내 이야기였어요. 나는 모르는 건 못 해요. 수박 겉핥기 같아서 못 보여주겠어요.” 

그래서 그는 화해하고 싶었던 아빠, 어쩐지 엇나가는 남자친구, ‘세상에 다시없는 친절한 곰’으로 자신을 설정하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를 노력을 기울인 자기 자신, 그렇게 잘 아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털어놓고 싶지만 털어놓고 싶지 않기도 해서, 빙빙 돌려 말할 수 있고 딴청 부리듯 말할 수 있는 그림책으로 털어놓는다. 그렇게 그는 반짝이는 자기 세계를 만들고 독자들의 눈앞도 반짝이게 만들어준다.


2021년부터 노인경은 사뭇 다른 반짝임을 보여준다. 귀여운 두 꼬마 밤이와 달이 이야기가 시리즈로 나오는 것이다. 의젓하면서 너그럽고, 조곤조곤 온화한 말로 동생을 이끄는 누나는 딱 노인경 자신 같다. 욕심도 억지도 투정도 귀엽기만 한 동생은 아들일까? 아니면 그도 작가 자신일까? 눈치 보지 않고 걱정하지 않은 채,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할 말 다 하고 싶은 내면의 자신? 이 두 아이의 조화는 정말 즐겁다. 2024년 ‘한국에서 가장 즐거운 책’에 충분히 선정될 만하다. 부드러운 위트가 풍성하게 담겨있는 사랑스러운 아이들 세계로 보기에도 즐겁지만, 한 조각 일상에서도 반짝임을 길어 올리며 내면의 자신에게 빛을 비추는 어른의 자취로 보기에도 즐겁다.

ⓒ문학동네(『특종! 쌓기의 달인』)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2022)로 2024년 IBBY 아너리스트에 오른 작가는 지금까지 쌓아 올린 것도 많고 빛나게 이룬 것도 많다. 하지만 그는 그 쌓아 올린 빛나는 것들이 무너지는 것도 재미있음을, 아니 무너져야 더 재미있음을 안다. 『특종! 쌓기의 달인』(2024)에서 확실히 보여준다. 걱정 많고 이성적이고 성실한 완벽주의자 어른과 마이동풍인 삐딱이 아이들이 한데 어울려 쌓고 무너뜨리고 쌓는 놀이를 하는 이 책을 보면 작가가 이제 많이 자유로워졌구나, 싶어 즐겁다. 나도 무너짐을 즐길 수 있는 거지, 싶어 마음이 흔쾌해진다. 이 작가와 함께 반짝거리고 싶어진다.


김서정_작가, 평론가, 『판타지 동화를 읽습니다』 저자


-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4년 6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 행복한아침독서 www.morningreadi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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