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그림책작가의 세계 - 경혜원
경혜원은 공룡 작가이다. 그의 본격 창작 그림책 중 공룡 이야기가 아닌 책이 거의 없을 정도다. 왜 이렇게 공룡에 파고드는 걸까? 그의 설명을 요약하자면, 환상이 환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한편 현실일 것을 바라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쩌면 이야기에서 판타지를 구사하는 모든 작가의 의표이기도 하겠지만, 경혜원은 공룡이라는 특화된 매체를 사용해서 그것을 자기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이루어낸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지만 완전히 환상적인 존재도 아닌 공룡. 한때 지구를 지배했던 공룡은 지금은 지극한 판타지의 표상으로 온갖 미디어 안에서 유령처럼 떠돌고 있으며, 여기저기 어딘가에서 발견되는 거대한 뼈들이 그 사이를 삐거덕거리며 이어주고 있다. 기묘하달까, 기구하달까, 이 매력적인 현상은 어린아이들을 가장 강력하게 사로잡고(온갖 공룡 이름을 줄줄 외우는 유치원 아이들을 보라!), 아이들과 소통하는 예술가들도 사로잡는다.
그러니까 그에게는 ‘현실과 상상을 잇다’는 명제가 중요하다. 그래서 공룡은 지구의 지배자로서가 아니라 일상의 향유자로, 특히 아이들과 긴밀한 교류를 나누는 이웃으로 기능한다. 아이들의 일상 속 크고 작은 기쁨과 슬픔, 재미와 고민이 공룡들을 통해 피어 나온다. 초기 작품들인 『특별한 친구들』『엘리베이터』『쿵쿵』은 아이의 생활 주변 온갖 사람들과 사물들을 공룡으로 만들어 놓는데, 인물의 전환뿐 아니라 공간의 전환도 ‘공룡스럽게’ 이루어진다. 놀이터의 미끄럼틀은 공룡 배 속이 되고,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이웃 주민 공룡들과 함께 광활한 자연에서 한판 놀이가 벌어지고, 옷장 속에서는 공룡들이 쏟아져 나오는 식이다. 현실과 상상의 연결은 이렇게 전면적으로 이루어진다.
공룡을 통해 아이들 삶의 반경을 대폭 확장, 전환시키며 자유로운 카타르시스를 안기는 이런 작품들 이후에 나온 『커다란 비밀 친구』와 『나와 티라노와 크리스마스』는 완연히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이야기가 아이들 마음속으로 축소, 몰입되는 것이다. 두 작품 모두 한 외로운 아이에게 어떤 공룡(들)이 어떤 상상의 전환점을 통해 위로와 희망의 빛을 건넨다는 설정이다. 『커다란 비밀 친구』의 주인공은 시작부터 결핍과 상처를 드러낸다(“우리 엄마는 아프다. 아빠는 바쁘다.” 이 짧은 두 문장이 쓸쓸하고 쓸쓸한 그림과 함께 울컥할 만큼 심장을 조인다). 『나와 티라노와 크리스마스』의 더 어린 주인공은 직접 언급은 안 하지만, 등장하지 않는 엄마와 공룡에의 집착을 통해 그 결핍을 내비친다(아기 해골 공룡이 장난감 공룡을 “엄마!”라고 부르며 뒤에서 답싹 안는 장면 또한 울컥 심장을 조인다). 현실과 환상이 서로 이어져서 우리의 삶을 이루듯, 활달한 기쁨과 웅크린 슬픔 또한 서로 이어져서 인간을 만들어나간다고 작가는 말하는 듯하다.
공룡만 그리는 것 같지만 사실상 이렇게 아이들의 전면적이고 다면적인 삶을 들여다보는 경혜원의 책은 그래서인지 전 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번역 출간되고 있다. 특히 대만이 그의 책을 사랑해 책 대부분이 수출되었고, 대만 오픈북어워드 베스트 그림책상을 받았으며, 원화 전시회를 갖기도 했다. 대만 외에도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 프랑스, 벨기에, 스페인, 멕시코까지 그의 책은 진출해 있다.
여러 나라로 책을 내보내다 보니 나라별 문화에 따라 책 꼴이 달라지는, 난감하게 재미있는 경우도 많다. 러시아에서는 어린이책에 검은색을 쓸 수 없다며 『공룡 엑스레이』 표지의 검정을 온갖 형광색으로 바꾸어 놓았다! 사정사정해서 간신히 형광을 빼고 흰색으로 타협을 보았다며 작가는 깔깔 웃는다. 『엘리베이터』는 현실을 프레임 안으로 넣고 환상에서는 프레임을 뺐는데, 멕시코에서는 정반대로 디자인해 내놓았다. “그래도 책은 예쁘더라고요!” 그는 또 깔깔 웃는다. 깐깐하기로는 일본이 최고다. 『공룡 엑스레이』는 정보책 성격이 짙은지라 공부를 많이 해야 했는데, 공룡 지식책이 생각보다 풍부하지가 않았다. 일본 출판사의 깐깐한 질문과 감수를 거치며 진땀을 뺐는데, 아무래도 개정판을 내야겠다는 생각이다.
해외 진출이 활발하기로는 책뿐 아니라 작가도 못지않다. 타이베이, 홍콩, 로마, 볼로냐, 파리, 디종, 샤르자, 멕시코시티 등을 누비며 그는 서점에서, 국제도서전에서, 중학교부터 대학까지 다양한 장소에서 전시회와 강연을 하고 아이와 어른 독자들을 만났다.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아저씨 그림을 이해하지 못하는 외국 작가와의 대담에서 문화 차이를 느꼈고, 『특별한 친구들』에서 건널목 줄무늬가 공룡 뼈로 그려진 모습을 보고 건널목 공포증을 극복했다는 독자에게서 동질감을 느꼈고, 『내 키가 더 커!』를 읽어주며 ‘어린 독자에게는 책만이 책이 아니라 읽어주는 사람도 책이다’를 깨달았다. 책 속 그림을 짚으며 “누가 가장 커?”를 묻자 작가의 손을 가리키며 “네 손!”이라고 대답하는 아이에게서 나온 깨달음이었다. 나의 손과 눈, 목소리, 고갯짓 하나하나가 아이에게 읽을거리고 배울 거리임을 깨닫게 된다면 어떤 작가, 어떤 어른이라도 눈짓 손짓 한 가지, 말 한마디를 함부로 할 수 없게 되지 않겠는가.
영문학을 전공해서인지 작가의 궁극적 목표는 ‘꼴’이 아니라 ‘이야기’다.
이런! 좋은 그림책작가 하나를 혹시 떠나보내게 되는 건가? 하지만 아직은 어린이책 작가라는 정체성이 좋다며 얼굴을 밝히는 그에게서 나는 아주 작은 공룡 콤프소그나투스를 떠올린다. 내 안에서 자발적으로 특정 공룡이 떠오르다니! 이 작가는 정말이지 공룡 발굴의 귀재가 아닐 수 없다.
김서정_작가, 평론가, 『판타지 동화를 읽습니다』 저자
-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4년 10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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