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의 두 거인
레지스 르종 글 / 마르탱 자리 그림 / 박정연 옮김 / 44쪽 / 19,800원 / 바둑이하우스
아주 먼 옛날부터 지금까지 지구의 순항을 관장하는 두 거인이 있다. 거인들은 지구 양극에 서서 그들조차 서로를 모른 채 지구를 두 발로 구르며 각자 한 방향으로만 걷고 있다. 한 방향으로만 걸으니 둘은 만날 일이 없다. 만나서도 안 된다. 이제껏 유지해 온 균형 자체가 깨지기 때문이다. 거인 둘 중 하나는 늘 지구 바깥세상을 본다. 별과 우주를 보며 로켓과 새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두 발로 성큼성큼 내딛는 걸음은 산사태를 일으키거나 생각지 않은 곳에 계곡을 만들기도 한다. 때론 바다를 헤집기도 하고 지진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또 다른 거인은 발끝으로 조심조심 땅을 살피며 걷는다. 머리 위 하늘에는 관심도 없지만 나라 사정이라면 모르는 게 없다. 아래만 내려다보며 걸으니 달과 비행기에 부딪히고 별에 긁힌다. 낮은 구름을 잘못 통과하면 감기에 걸리는데 재채기는 태풍이 된다. 사람들은 다들 거인을 볼 순 없어도 거인이 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과학이 이토록 발전하기 훨씬 이전, 예측하기 힘든 재난이 일어날 때마다 인류가 기댔던 건 종교적 신앙이었다. 그보다 더 오랜 인류는 이야기로 전해오는 신화 속 거대하고 신비로운 존재들이 모든 일을 관장한다고 믿었다. 다양한 신화 속 거인들은 대개 감정 변화가 극단적이고 거칠어서 인류를 위협하는 모습으로 그려지곤 했다. 간혹 사람들을 돕는 친근한 거인도 있었다고 한다.
불과 수십 년 전, 우주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궁금해하던 소년이 있었다. 바로 『지구의 두 거인』 이야기를 쓴 레지스 르종이다. 소년은 결국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 인간이 우주 속의 지구를 움직이게 하고 지금처럼 잘 돌아가게 만드는 거라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낸다. 어린 시절의 아이디어는 2001년, 직접 쓰고 그린 그림책으로 출간되었다. 한국에는 번역되지 않았다. 시간이 꽤 흐른 2020년, 코로나가 인류를 전 지구적 위기 상황으로 몰아가기 시작했을 때 작가는 자신의 오랜 기억 속 아이디어를 되살려낸다. 모든 걸 과학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던 21세기, 무적이라 생각한 인류가 도무지 손을 쓸 수 없는 재난 상황, 팬데믹이 그만큼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고 무기력한 상황을 설명하기에 작가로서 두 거인 이야기가 적절했을 것이다. 거인들의 움직임에 한 치 오차라도 생길 때 지구 전체가 위기에 빠지게 된다는 설정은 마침내 그림책으로 만들어졌다. 작가는 우주의 조화가 깨어질 때 인류의 실존은 어떻게 위협받는가를 질문하는 중이다.
마르탱 자리가 다시 그린 이 책은 다소 어둡게 작업한 원작품보다는 훨씬 경쾌한 분위기다. 대신 질감을 거칠게 만들어 좀더 자연에 가까운 느낌이 들게 표현했다. 그의 작업은 거의 재활용한 종이에 칠하고 자르고 붙이는 일을 반복해 완성된다. 버려진 과일 운반용 나무 조각들을 얼기설기 붙이는 방식도 활용한다. 시원적 존재인 거인을 표현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재료들이다. 그가 선택한 재료와 조형은 기존 언어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게 해주는 일러스트레이션으로서의 기능에도 충실한 작품이 되었다.
김혜진_그림책보다연구소 대표, 『야금야금 그림책 잘 읽는 법』 저자
-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4년 12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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