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용선 지음 / 388쪽 / 19,000원 / 틈새책방
책을 읽다 보면 알 수 없는 먹거리를 만나곤 했다. 삼보가 놀려준 호랑이 버터라든가, 『나니아 연대기』에 나오는 한번 맛보면 잊을 수 없는 푸딩이라든가, 말괄량이 삐삐가 먹는 각설탕이 다섯 개나 들어간 커피(삐삐는 그 커피에 과자를 적셔서 먹었다!) 같은 것들 말이다. 이 중 유일하게 커피만 그 정체를 아는 먹거리였는데, 무슨 이유인지 삐삐는 마시지만 우리나라 어린이는 커피를 마시면 안 된다는 확고부동한 규칙이 있었다. 어렸을 때는 그게 너무 부당하게 느껴졌다.
버터와 푸딩과는 달리 싱크대 찬장에 들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커피는 마셔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손님이 오셔서 커피 대접을 하는 날이면 집 안에는 커피의 달달한 향이 가득 찼고 ‘언젠간 먹고 말 테야’ 하면서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게 되었다. 특히 TV에서 아이스 커피를 광고하는 걸 보면 정말 너무나 시원하면서 달콤한 커피라는 것을 꼭 먹어봐야겠다고 꿈꿀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혼자 집을 지키던 나는 드디어 사고를 쳤다. 커피와 설탕을 듬뿍 넣고 찬물과 얼음을 넣어 아이스 커피를 ‘조제’한 것이다. 하지만 커피(맥스웰 커피였다)는 녹질 않았고 커피잔만 더럽혀진 채 맛이라고는 정말 하나도 없어서, 나는 세상에 대한 배신감마저 느끼고 말았다. 광고란 거짓말투성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그렇게 맺은 인스턴트커피와의 인연은 자판기 커피로, 일회용 커피믹스로, 그리고 원두커피로 옮겨갔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테라로사 원두로 드립한 커피 한 잔을 마시는 중이다. 생의 절반 정도를 함께한 커피지만 커피의 역사를 통해 우리의 역사를 이렇게 풀어낼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 커피가 들어온 조선 말부터 강릉이 커피의 도시가 되는 데까지의 긴 시간을 커피와 함께 달려간다.
책은 시대순으로 여섯 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는데, 네 개의 챕터는 역사 속의 이야기로 흥미진진하고 뒤의 두 개 챕터는 내가 살아온 시간과 겹치면서 여러 가지 감상에 젖게 했다. 대학에 들어갔을 때는 음악다방이 서서히 쇠퇴하던 시점이었다. 그렇긴 해도 학교 가는 길에 있던 음악다방 ‘명작’은 우리 동기들의 아지트 같은 곳이기도 했다. 또 지하철역을 나오면 바로 만나던 쟈뎅 이름도 발견하니 마치 대학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우리가 커피라고 통칭하지만 믹스커피와 드립커피는 이걸 같은 커피라고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맛이 다르다. 오죽하면 믹스커피를 ‘커피 맛 음료’라고 부를까.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커피는 당연히 아직 인스턴트커피가 개발되기 전이었으므로 커피 가루에 끓는 물을 부어서 먹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아쉽게도 이 책은 커피라는 음료에 방점을 찍은 책이 아니라 그 부분은 짐작만 하고 넘어간다. 그보다는 커피라는 신문물을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우리 사회가 어떻게 반응했는가를 살펴본다.
고종이 커피 애호가라는 사실에서 출발하여, 커피를 이용한 암살 기도와 결국 죽음에까지 드리운 커피 독살 음모설까지 차분하게 살펴보면서 고종이 날려 먹은 독립과 자주의 길에 대한 아쉬움도 피력한다.
일제강점기로 접어들면서 커피는 다방과 떨어질 수 없게 된다. 천만 관객의 영화 「밀정」에 우리나라 최초의 다방 카카듀가 나왔다는 점도 읽다가 알게 되었다. 요즘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얼어 죽어도 아이스 커피’라는 ‘얼죽아’의 유행이 이미 이 시대부터 있었다는 점도 놀라운 이야기였다. 하긴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겨울에 차가운 면을 먹는 종족이 한국인이니 그럴 만도 하다.
한국전쟁을 거친 뒤에 미군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커피에 사람들이 익숙해지기 시작하고 동서식품이 인스턴트커피를 생산하면서 집집이 맥스웰 커피병이 놓이는 시대를 맞이했다. 이 시절에 좀 사는 집 학생은 이 커피병에 김치를 담아서 도시락 반찬으로 먹곤 했다. 이런 이유로 제조회사는 병 부족에 시달렸다고.
나 역시 이 시절에 커피를 접했기 때문에 원두 드립커피라는 맛은 전혀 알지 못했다. 일회용 믹스커피도 인스턴트커피에 기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서 쉽고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사실 이 점에서 오늘날 스타벅스로 대표되는 원두커피의 시대가 이렇게 순식간에 사회에 퍼진 점은 놀랍기만 하다. 과연 우리나라 사람들은 ‘빨리빨리’의 민족이구나 싶다.
스타벅스가 처음 등장했을 때, 소수의 원두커피 마니아들은 스타벅스를 상당히 무시했었다(아마 지금도 그럴 것 같긴 하다). 스타벅스의 커피는 진정한 원두커피라고 할 수 없다는 말들을 참 많이 했다. 하지만 스타벅스의 강점은 커피 맛이 아니라, 커피를 마시는 분위기를 만들어낸 데 있다. 어떤 면에서는 1970~80년대의 다방 분위기를 현대적으로 재구성해 냈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문인들이 모여서 커피 한 잔씩을 시켜놓고 서로의 문학관에 대해서 편안하게 늘어놓던 그런 모습이 이제는 보편화되어 구현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책을 읽으며 시간 여행을 하며 커피를 음미하는 것 같았다. 역사와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이문영_역사작가, 『정생, 꿈 밖은 위험해!』 저자
- 이 콘텐츠는 <동네책방동네도서관> 2025년 2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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