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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드 큐레이터 서윤 Mar 20. 2023

무궁무진 변신 가능한 팔색조 요리

추억 한 끼  라면 먹고 갈래?

봄날은 이유 없이 설렌다. 주말 저녁, 제철 미나리를 넣고 라면을 끓였을 뿐인데 봄이 느껴졌다.


어릴 적 집밥 하면 떠오르는 몇 가지 메뉴가 있다. 김치찌개, 된장찌개, 계란말이, 콩나물잡채, 그리고 라면이다. 소박하지만 따뜻한 맛이 담겨 있는 엄마의 밥상이야말로 최고의 힐링 푸드였다. 시장 가게와 딸린 방에서 여섯 식구가 함께 살았을 때 엄마는 장사하느라  바쁜 일상 탓에 온 가족이 끼니를 대충 때우는 날이 많았다. 그럴 때면 항상 그립고 먹고 싶은 건 엄마표 밥상의 온기와 냄새 그리고 정성 가득한 반찬들이었다.  


나란히 여섯 식구가 줄지어 누워서 시끌벅적하게 떠들다 보면 어느새 하나둘씩 곯아떨어지곤 하던 시절, 가족과의 행복했던 순간 즐거웠던 기억만큼 속상한 기억도 떠오른다.  끼니때가 되면 엄마는 바쁜 가게 일 때문에 후다닥 식구 수대로 라면을 끓여주던 때가 많았다. 계란도 넣고 파도 송송 썰어서 먹기 좋을 만큼 쫄깃하게 끓여주셨다.  라면 한 젓가락을 엄마 입에 넣기도 전에 때 맞춰 찾아든 손님들을 상대하느라 엄마는 결국 불어 터진 라면을 드셔야 했다. 불어 터진 라면을 드시면서도 혹여나 손님들이 들어오지는 않을까 시선은 항상 가게 밖으로 향해 계셨다. 밥 한 끼를 편하게 드시지 못했던 엄마를 보면서 열 살배기였던 나는 시키지도 않았지만 가게로 나가 엄마 대신 귤을 팔았다. 그것도 아주 씩씩하고 상냥하게~


바쁘지만 않으면 가족들 건강을 위해 몸에 좋은 재료로만 요리하셨던 엄마 덕에 우리 집 식탁은 언제나 풍성했다. 시장에서 살았던 덕분에 싱싱하고 계절에 맞는 갖가지 재료를 남다르게 이용해 세상에 없는 요리를 맛보게 해 주셨다.


예를 들면 라면을 끓일 때도 똑같은 라면을 계절 따라 다른 식재료를 넣어 끓여주셨다. 봄에는 반찬으로 나물을 상에 올리고 나면 그다음에 남는 나물로 라면에 넣어 끓여 주셨는데 냉이며 달래며 미나리 등을 넣고 고춧가루를 더하기도, 된장 한 스푼을 더하기도 했었다. 여름에는 국수대신 엄마의 열무김치를 넣고 그 시절에 비빔라면을 해주기도 하셨다. 바지락이 살이 차올라 있을 때는 바지락을, 김장철 민물새우가 나올 때는 민물새우를... 언제나 라면을 일품요리로 변신시켜 주셨다. 바쁜 틈 사이사이 엄마는 그렇게 우리들의 밥상을 책임지셨다. 비록 일주일에 두, 세 번은 라면을 먹었지만 그때 먹었던 음식들은 지금까지도 내게 큰 힘이 된다.


엄마가 보내주신 반찬들을 꺼내 쌀밥 한그릇을 다 먹고 마음이 허기진 탓인지 위가 늘어난것인지 라면 한그릇을 또 끓여 먹었다. 아무리 힘들고 지쳐도 따뜻한 밥 한 끼면 다시 일어설 용기가 생긴다.


특별할 것 없던 평범한 밥상이었음에도 세상에서 엄마밥이 맛있다고 해주었던 우리 아이들! 가끔 나를 위해 끓여준 막내아들의 라면 한 그릇이 생각난다.  지금도 누군가에게 따뜻한 밥상을 차려주다 보면 엄마가 끓여주시던 라면이 생각나 하나의 재료로도 다양하게 아이디어를 낼 수 있는 창의력이 발동한다. 어쩌면 내가 음식을 하는 업을 가지게 된 것도 엄마의 다양한 변신 라면을 많이 먹어서인지도 모르겠다.

파김치,얼갈이김치,무생채,알타리 김치,홍어 무침으로 채운 엄마 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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