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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는사람소소 Nov 04. 2020

7.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11월




셋째가 작년 10월 말에 태어났기에 지난 해 11월은 내내 집에서만 보냈다. 11월 초 조리원에서 처음 집에 돌아왔던 순간은 아직도 또렷이 기억이 난다. 셋째와 텅 빈 집에 들어서니 집을 떠났던 10월과 다른 냉기가 엄습했다. 그 냉기가 내가 견뎌야할 육아의 온도 같아서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서러웠다.     




남편은 타지에서 대학원을 다니는지라 주말에만 집에 왔고 다섯 살이던 첫째도 아직 유치원에 다니고 있지 않았기에 아이들이 주중에는 집에서만 놀아야 했다. 세 아이 돌보고, 집안일을 하다 우울해질라치면 '내 너 올 줄 알았다'며 당황하지 않고 초코쿠키를 먹었다. 작년 11월은 지우개로 지운듯 애써 되짚어봐도 떠오르는 장면이 별로 없다. 하지만 두 번이나 해보았기에 버텼다. 시간은 흐르고, 아이는 자라며, 나도 자란다는 걸 경험했기에.   




그렇게 1년이 지나 세번째 돌잔치를 치루었고 11월 초에 첫째, 둘째가 돌사진을 찍은 스튜디오에서 셋째도 전통스타일로 한 컷 돌사진을 찍음으로써  가장 힘든 돌까지의 1년을 잘 마쳤다.  








사실 11월에는 날이 추워지고 미세먼지도 심해져서 애들 데리고 나가놀지 못할 까봐 미리 잔뜩 걱정했었다. 하지만 의외로 미세먼지수치는 낮았고, 햇빛도 따사로워서 낮에는 베란다 문을 활짝 열고 집안에서 일광욕을 한 날도 많았다. 오전에는 둘째, 셋째와 집에서 놀다가 네 시쯤 첫째가 하원하면 다 같이 학교나 아파트 주변을 산책하거나 놀이터에서 놀았다.     




신발만 신고 나가면 되는 여름과 달리 11월이 되니 내복 위에 외출복과 외투를 입히고 목도리, 장갑, 모자까지 챙기려니 준비가 오래 걸린다. 여기에 추울 때 마실 따듯한 물이나 핫초코까지 챙기면 드디어 외출 준비가 끝난다. 반대로 신나게 놀고 들어와서 아이들이 벗어놓은 옷을 정리해서 서랍에 넣는데도 한참이 걸린다.   




이제 혼자 옷을 입게 된 4살 둘째에게도 외출복을 덧입을 때 소매가 따라올라가지 않도록 엄지 빼고 네 손가락으로 내복 소매를 잡으라고 가르쳐주었다. 양말도 내복 발목 위로 겹쳐서 신어야 한다고 가르쳐주었지만 네 살에게 그 정도의 정교함은 아직 무리이기에 도와준다. 첫째는 4살 때 겨울이 다 가도록 벙어리 장갑 엄지 부분에 손가락을 못 끼워넣었는데 둘째는 단번에 찾아 넣어서 참 신통했다. 이렇게 소소하지만 필수인 겨울철 옷입기 수업도 마쳤다.



    





올해 처음 아이와 해본 겨울놀이는 바로 연날리기다. 첫째가 유치원에서 가오리연을 만들어와서 초등학교 운동장에 가서 자주 날린다. 둘째는 아직 연이 뜰 정도로 빨리 달리지 못해 연날리가 아닌, 연을 질질 끌며 '연달리기'를 한다. 엄마도 한 번 날려보라 해서 날려보니 연과 함께 내 마음도 하늘에 동동 뜨는 듯 신이 났다.  얼레를 붙들고 신나게 뛰는 아줌마를 보며 초등학생들은 어리둥절해한다. 바람에 연을 띄우는 단순한 놀이지만, 쌩생 부는 겨울바람이 고마워지게 만들 정도로  매력적인 구석이 있다.     




아침 유치원 등원길 애창곡은 '가을길'이라는 동요였다. “노랗게노랗게 물들었네 빨갛게빨갛게 물들었네 파랗게파랗게 높은하늘 가을길은 고운길 트랄 랄랄라 트랄 랄랄라 트랄 랄랄라 노래부르며 산넘어 물 건너 가는길 가을길은 비단길(1절) 가을길은 우리길 (2절)”  '가을길은 우리길'이라는 가사는 날마다 오가는 우리의 등원길을 두고 쓰인 듯 와닿았다. 하이라이트인 '트랄 랄랄라' 부분에 이르면 흥이 넘쳐 절로 샤우팅이 되어서 아파트 주민 모두 우리의 등원을 아실 수 있었다.    







등원길에는 단풍나무가 두 그루 서 있는데 둘 중 하나는 빨강으로 물들고 다른 한 그루는 노랑으로 물들었다. 은행잎이 아니라 단풍잎이 노랑으로 물드는 게 신기해서 단풍나무에 대해서 찾아보았다. 나뭇잎이 노란색으로 물드는 이유는 잎 속에 있는 '크산토필'이라는 노란색 색소 때문이라고 한다. 크산토필은 봄에 잎이 달리기 시작할 때부터 만들어지지만 녹색을 띄는 클로로필에 비해 함량이 적어서 여름까지는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다. 하지만 가을이 되어 엽록소가 사라지면서 초록색에 가려졌던 노란색이 드러난다고 한다.     




이 아파트에 5년을 살았지만 노란 단풍잎은 올해 처음 발견했다. 그리고 이 노란 단풍잎과 함께  11월의 아름다움도 올해 처음 발견했다. 11월은 내가 태어난 달이긴 하지만 추위에 약한 내게 11월은 겨울의 시작일 뿐 좋아하는 달이 아니었다. 아름답다는 말은 봄이나 여름에 어울리는 단어라고 생각했는데, 처음으로 11월이 아름답다고 느꼈다. 생명이 태어나고, 자라나는 봄과 여름만 아름답다고 생각했는데, 그 생명이 사라져가고 비워진 모습도 아름다웠다.      







여름의 무성한 연초록빛 논과 황금빛 가을 들녘도 아름답지만, 추수를 마친 고요한 초겨울의 들판도 붉은 노을 아래에서 아름답다. 적란운을 뽐내는 여름하늘이나 높고 청명해진 가을하늘도 아름답지만, 춥다고 덮어썼던 모자를 벗고 올려다보니 겨울하늘은 가을하늘보다 더 명징했다. 사려 깊은 갈색나뭇잎들은 진초록 토끼풀들을 덮지 않고 그 주변에만 떨어져 둥그렇게 감싸고 있다.     




11월은 춥고, 그래서 당연히 웅크리게 되는 계절이었는데 올해 11월은 나의 차가운 기대를 뛰어넘어 뜻밖의 선물을 건넸다. 11월도 아름답고, 즐거웠고 그래서 더욱 감사했다. 작년 11월을 집 밖으로 한 번 나와보지도 못 하고 보냈기에, 더 아름답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내 생애 가장 힘겨웠던 11월 다음엔 가장 아름다운 11월이 기다리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내년 11월은 또 어떤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내게 보여줄까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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