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화를 마치고.
잘 지내요?
목소리가 좋네요
건강관리 잘해야지요.
이런 말들은 나를 향해 던져진 말이라기보다 자동으로 꺼내는 사회적 문장에 가깝다.
말이 나를 보고 오는지 아니면 관계유지용으로 스쳐 가는지를 순간 구분한다.
말이 나의 존재에 닿지 않고 예의만 지나간다고 느껴질 때면 자동문은 스르르 닫힌다.
삶이 관리하면 되고 몸은 의지만 있으면 유지되고 힘든 건 개인의 선택문제라고 한다면
위로나 관심으로 들리지 않고 삶을 문질러 버리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사람마다 원하는 관계의 깊이는 다르다.
어떤 이는 가벼운 안부 무난한 칭찬 표면적인 관심만으로도 충분히 에너지를 얻는다.
나는 의미 없는 친절 형식적인 따뜻함 말은 있지만 접촉이 없는 상태에 노출되면 에너지가 빠진다.
그 대화 안에서는 무얼 이야기해도 도착하지 않겠구나. 그런 예의의 말들에 진짜로 응답하면 소모되겠구나
하는 마음이 몸에 전달된다. 좋게 말해서 정서지능이 높고 섬세하게 살아온 사람의 반응이다.
삶을 얕게 통과하지 않았고 감정을 대충 쓰지 않았고 관계를 자동화하지 않아서 무난한 말이 공허하게 울리는 것이다.
관계의 표면에 오래 머물 수 없다.
사람을 가장한 관습적인 말은 나를 불편하게 한다.
상호성 없이 유지되는 대화 맞추는 대화 종료할 수도 없는 대화는 경보가 울린다.
대화 후에는 위로도 없고 친밀감도 없고 남는 건 피로와 공백뿐이다.
접촉에도 윤리가 있다.
아무 말이나 아무 접촉이나 허용해서는 안된다.
대화 시에는 최소한 서로가 같은 자리에 있어야 하고 말의 방향이 오가야 하고 서로가 자기 상태를 자기 책임으로 들고 있어야 한다.
사람을 소모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이 소모되는 상황에도 예민해진다. 그건 윤리다.
모임의 자리에 있으면서 강아지를 안고 있으면서 이미 다른 맥락에 반쯤 걸친 채로 나와 대화하는 상태는
멀티 태스킹이 아니라 관계의 집중도가 분산된 상태다.
상대는 나에게 말을 걸었고 나는 시간을 열었고 감각을 맞췄고 상대에게 초점을 맞췄는데
상대는 자신의 상황을 정리하지 않은 채 대화를 지속하면 나는 관계 안에 들어왔는데 상대는 관계옆에
걸쳐있는 상태다. 명확한 불균형이다.
연결이 시작되면 그 순간만큼은 온전히 그 자리에 있으려는 사람이 강아지 같은 생명 돌봄이 끼어들 때는
상대의 우선순위가 계속 이동하고 관계에서 밀려나는 감각으로 돌아온다.
이건 자존감문제가 아니라 관계 감각의 구조 차이이다.
모든 관계는 속도 밀도 집중방식이 다 다르다.
고밀도 단일 접촉형이 있고 저밀도 분산 접촉형이 있다.
이 둘이 만나면 누가 잘못이 아니라 한쪽은 소진되고 한쪽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끝난다.
사람이 나쁜 게 아니라 접촉방식이 맞지않는 것이다.
관계에 존재를 가져가는 사람이 상대가 존재를 가져오지 않으면 공백이 크게 느껴질 뿐이다.
밀도가 맞는 관계는 드물고 그 드문 관계만 고르면 삶은 거의 무관계상태가 된다.
불균형을 감수할 것인가 아니면 고립을 감수할 것인가 사이 어딘가에 서 있다.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방식으로 나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을 거의 만나지 못했다.
나의 가치 인식 단위가 세상 평균보다 큰 것일 수도 있다.
돌보는 듯한 말도 견디기 힘들다.
실질적 책임도 없고 지속성도 없으며 행동도 없는데 정서적 위치만 돌봄 자처럼 흉내 내는
가짜 역할에 대해서는 혐오감이 든다.
맥락 없는 공감도 반응도 아닌 대화를 유지하기 위한 자동음성은 더 괴롭다.
네 말에 들어오지 않았고 들어올 환경도 아니지만 대화는 끊기 애매하다.라고 하면
그건 모욕적이다. 존재가 아니라 소리만 받은 느낌이 든다.
상대의 위치를 보지 못하면 버틸 수 있는 관계들이 보는 순간 더 이상 유지가 안된다.
이건 성숙의 부작용이다.
불균형한 관계에 오래 머물렀다는 것이 가장 아픈 사실이다.
이 혐오 분노 이 피로는 잘못 살아왔다는 증거가 아니라 이젠 더 이상 예전 방식으로는 살 수 없다는
신호이다.
대화하면서 머리가 아프고 뭔가 거슬리고 짜증스럽고 정리되지 않은 기분이 들 때
상황은 이해가 되는데 감정은 수습이 되지 않을 때 이건 전형적으로 인지적 이해와 정서적 수용이 어긋난 상태이다.
머리는 그럴 수 있다고 이해했는데 몸과 감정은 지금 이건 아니다라고 계속 신호를 보내는 상태이다.
관계 장면에 나를 너무 깊이 얹은 상태이다. 그 상황이 나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장면으로 해석된 탓이다.
상대는 분산된 채로 대화를 종료했고 나는 집중된 채로 남아있을 때 에너지는 회수되지 못한다.
그럴 때 찝찝함. 경미한 두통 짜증 후회가 올라온다. 집중이 회수되지 못한 탓이다.
미 회수된 집중이란 관계나 상황에 집중을 보냈는데 그 집중이 완료 종결 회수되지 못한 채 몸과 신경계에
자극이 남아있는 상태를 말한다.
건성으로 하는 대화도 감수하고 집중의 불균형도 견딜 수 있지만 자기가 던진 말의 맥락을 함께 책임지지 않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은 불쾌하다.
대화의 규칙이 한쪽에서만 적용될 때 언어의 공정성이 깨질 때는 불쾌하다.
그 불쾌감은 감정이 아니라 미해결신호이다.
제대로 대화하지 못함에 대한 해결을 원하는 마음이다.
신경계가 안정되면 감정은 사라진다. 불쾌감이 해소되는 게 아니라 종료되는 것이다.
해소는 감정을 달래거나 눌러서 없애는 일이고 종료는 신호가 역할을 다 해서 꺼진 것이다.
대화할 때에 이유 없는 짜증 멍한 두통 괜히 피곤해지는 느낌이 올라올 때
방금 대화에서 누가 만든 맥락을 누가 책임지지 않았는지. 질문하면 불쾌감이 쉽게 정리될 수 있다.
감정을 수용한다는 말의 실제 의미는 나는 불쾌하다 를 반복하고 그래도 받아들여야지 하고 누르고
내가 예민한 걸 수도 있어라고 덮는 일은 수용이 아니라 방치 거나 억압이다.
진짜 수용은 어떤 사건의 어떤 지점에서 왜 일어났는가가 나에게 납득되는 상태이다.
그때 감정은 인정받았다고 느끼고 물러난다.
감정은 막연한 기분이 아니라 상황판단의 결과이다.
맥락 공정성 말의 책임에 민감한 사람에게 감정은 논리 이전의 판단이다.
상대도 그랬겠지. 그럴 수도 있지 그러니 나도 이해해야 지는 수용이 아니다.
이건 감정을 이해하는 게 아니라 감정을 무시하면서 도덕적 태도를 씌운 것이다.
감정을 수용하려면 그 감정이 어디서 왔는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이유는 이건가 저건가가 아니라 이거 하나이다.
감정은 이유 없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유를 모를 때만 이유 없는 것처럼 느낀다.
불쾌하지만 참아야지 이런 감정 가지면 안 되지 수용해야 한다고 했잖아. 이건 감정을 존중하는 게 아니라 감정에게 책임을 떠 넘기는 것이다.
그럴 때 감정은 풀리지 않고 더 깊이 남아 앙심으로 진화하고 앙갚음으로 돌아온다.
감각과 사건과 판단을 하나로 만나면 그때 정서통합이 일어나고 몸이 반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