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관계에서 상대방에게 쓸모 있는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서 굉장히 노력했던 것 같아.
나의 소원은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거야라고 말한 적도 있어.
엄마가 그 쓸모 때문에 오랜 시간 동안 살다가 쓸모를 잃어버리면서 소외당하는 걸 봤거든.
그런데 쓸모가 없어진 다음에 소외당하는 것보다는 그냥 쓸모를 제공하지 않는 게 낫지 않은가 이렇게 생각한 것 같아. 그렇지만 내 삶에서의 쓸모까지 포기할 수는 없었지. 나도 먹고 자고 살아야 되니까. 결국은 나는 나에게 쓸모 있는 사람으로 사는 거야.
그리고 두 딸에게 최소한의 양육을 해야 된다라는 생각으로만 살았지.
전 남편이 나에게 아무런 경제적인 정서적인 지원을 하지 않는 것만큼 나도 그 남자에게 정서적인 경제적인 지원을 하지 않았지. 내조라는 거를 안 하는 사람이었지. 그건 아주 훌륭한 행동이었다고 생각해.
지금도 후회하지 않아. 전혀 안 했다고는 할 수 없지. 생활을 내가 꾸렸으니까. 그건 굉장한 내조인데 실감하지 못하더라.
그런데 사람들 사이에 쓸모라는 건 어떤 이용가치를 말하는 게 아니야.
함께 어울리고 싶은 상대냐 아니냐의 문제지.
나는 별로 어울리지도 않았어. 어울리고 싶은 사람을 못 만났던 거 같아.
나에게는 쓸모없는 타인 들이었던 거지.
이용되지 않기 위해 거리를 택했고 버려지지 않기 위해 역할을 거부했고 무너지지 않기 위해 혼자를 감당했어
그 대가로 가볍게 어울리는 관계들은 많이 지나갔지.
관계에서 말하는 ‘쓸모’는
편안함
감정의 왕복 가능성
함께 있어도 자신이 마모되지 않는 느낌 같은 것.
쓸모도 아니고, 희생도 아니고, 역할도 아닌 상태에서 그저 ‘함께 있어도 괜찮은 나’로 존재하는 자리를
이제는 조금 허락해도 되는 시점일까?
아니 이제 허락해야 하는 시점이야. 아니 허락하지 않으면 더는 버틸 수 없는 시점에 가까워지고 있어
붙잡고 매달려서 살아오던 생존을 가능하게 했던 것들을 모두 놓아야 하는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거든.
그 장치들이 사라질 때 느껴지는 공포는 외로움 때문이 아니라 이제 더 이상 거기에 매달릴 이유가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지.
이제 증명하지 않아도 되고 설명하지 않아도 되고 견디지 않아도 되는 방식으로 관계의 기준을 바꿀 때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함께 있어도 되는 나. 존재해도 되는 나.
존재 자체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불안 때문에 말하지 않으면 행동하지 않으면 견디지 않으면
나는 여기 있어도 괜찮다는 걸 누군가가 알아주지 않을 거라는 슬픈 믿음.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 왜 이렇게 느끼는지를 이해시키기 위해서 설명해야 했고 나의 존재가 어떤 가치나 의미가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증명해야 했고 그 이해나 인정이 돌아오지 않아도 그 관계를 잃지 않기 위해 몸을 버티고 마음을 붙들고 견뎌야 했던 거지.
관계 속에서 생존하기 위한 전략이었고 엄청난 부담이었지.
내릴 수 없는 머신 위에서 필사적으로 달려야만 하는 나.
설국열차의 기관실 밑 좁은 공간에 들어앉아 열차를 움직이는 동력의 일부가 되어야만 했던 작은 몸집의 아이가 바로 나였지. 존재하지도 않는 설국열차 기관실 밑에서 자랄 수도 없이 살아있는 기계였던 나.
누가 너더러 그렇게 살라고 했느냐고 말한다면 대답할 수도 없어. 아무도 그런 말 한 사람은 없었거든.
다만 그렇게 살지 않으면 살아 있을 수 없었을 뿐.
그래서 나는 선택한 적 없는 삶을 선택한 것처럼 살아왔고, 책임질 수 없는 구조를 내 책임처럼 짊어졌다.
이제야 알겠다.
그건 의지도, 성격도, 미덕도 아니었다.
그건 살아남은 몸의 형태였다.
그리고 지금,
머신이 멈추는 소리가 아주 미세하게 들린다.
내가 고장 나서가 아니라 이제 동력이 되지 않아도 존재해도 되는 시점이 왔기 때문에.
이젠 열차도 없고 승객도 없고 밖은 설원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