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말을 듣고 싶니?

진정 듣고 싶었던 그 말 이제야 해 줄 수 있는 말.

by 정오의 햇빛

내가 원했던 것은 나를 가르치거나 이해시키는 어른이 아니라 나를 어르고 놀아주는 어른이었던 것 같다.

까꿍, 아르르, 어디 갔지? 딸랑딸랑 소리를 내며 나를 바라보는 얼굴. 나를 보며 재롱을 부리는 엄마.

어른이 된 나는 “지적인 대화가 하고 싶다”라고 말해왔지만 사실 그 말은 가짜였다.


아기에게 까꿍과 아르르는 가장 지적인 언어다. 존재를 향해 직접 말을 거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름을 당해보지 못했다. 둥기둥기 안아 올려지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대상과 놀아주는 일을
설명하는 것으로 대신하며 살아왔다.

어른이니까, 성인이니까 어른끼리는 지적 유희로만 만날 수 있다고 믿으면서.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사랑받고 싶었던 거 아니야?”라고. 의미는 비슷하지만, 그건 나의 언어가 아니다.

사랑이라는 말은 너무 추상적이다. 사랑받는다는 게 정확히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리고 사랑은 언제든 권력이 되어 사람을 망가뜨릴 수 있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나는 어디에서도 안심하고 사랑받을 수 없다고 느껴왔다.

내 언어로 말해지기 전까지는. 무엇을 원하는지 모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원했던 것은 “내 존재가 귀엽고, 소중하고, 인정받는다”는 감각이었다.
존재 자체로 놀아지고, 어르고, 즐거워지는 경험. 글로 적으면서 처음 알게 되었다.

형태 없이 떠다니던 욕구가 언어라는 형태를 입는 순간 그 욕구가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드러났다는 걸.

한 번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비로소 형태를 가지자 생각이 몸으로 내려왔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몸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순간 내 안에서 울린 말은 이것이었다. 나도 놀아져도 되는 존재였어. 어름 받아도 되는 존재였어. 이건 욕망의 고백이 아니라 허용의 말이었다.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와 분리되어 비로소 알게 된다.


내가 괴로웠던 이유는 어름을 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너는 어름을 받으면 안 되는 존재”라는 부정의 문장이
내 안에서 계속 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기의 존재를 부정하는 그 내면의 목소리 때문에 나는 평생을 지푸라기처럼 살았다. 얼림 받지 못한 경험이 존재 자체가 부정당한 기억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이걸 언어화할 수 있게 된 것은 내 존재가 이제야 생겼기 때문이다.
존재의 이야기는 존재가 되어야만 할 수 있다. 존재가 되지 못한 상태에서의 아픔은 허상에 가깝다.

치유되지 못한 채 같은 자리로 돌아오는 파도처럼 반복될 뿐이다.


통찰은 중요하다.
하지만 통찰이 삶을 바꾸려면 몸에 닿아야 한다. 아픔이 생각이 아니라 감각으로, 존재로 느껴질 때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공명한다. 그때 과거는 현재를 통해 치유된다.


얼음 속에 갇힌 아이는 성장하지 못한다. 물속에 잠긴 아이는 평생 익사의 공포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아이는 초원으로 가야 한다. 발등을 간질이는 풀을 느끼고 아침 이슬을 밟으며 막대기 하나로 온 세상을 얻은 듯 뛰어다녀야 한다.


이 말은 누군가에게 듣고 싶었지만 아무도 해주지 않았던 말이다.
그래서 이제 다 늙은 내가 언제 적인지 모를 나에게 해주는 말이다.

아이야.
푸른 솔밭에서 마음껏 놀아라. 소리쳐라. 첨벙거리며 장난쳐라.

무엇이 되려고 무언가로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거기서 그렇게 존재하면 된다.


너는 이미 너다.
그것이 너다.


평생을 허우적거리다 늙음이라는 섬에 닿은 조난자가 바로 나다.

이 섬엔 사람이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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