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긷는 늙은이

글린이에요.

by 정오의 햇빛

새벽이면 물동이를 지고 물을 길러 간다.
어둠의 저편으로 물을 길러 간다.
추운 겨울날, 물동이에 물을 이고 어두운 길을 돌아와 물동이에 물을 붓는다.
물동이의 깊이는 보이지 않는다.
얼마만큼 부어야 가득 찰지 알 수 없다.
가득 채울 수 있을지도 확실하지 않다.
어쩌면 바닥이 깨져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내가 할 일은 분명하다.
물을 긷는 일과 물을 붇는 일.
누군가 그 물동이에서 퍼낸 한 종지의 물로
목을 축이고 시원함을 맛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누가 와서 마실지 모르는 물동이에 물을 붇는 일은
경건하고도 신성하다.
어쩌면 이 일은
내가 일생을 들여 갈고닦은 유일한 기술일지도 모른다.
이 기술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에게 닿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삶에서 이룬 가장 큰 성취가 될 것이다.
떨어지는 낙엽을 모으던 어린 시절,
떨어진 동전을 주우러 다니던 젊은 시절,
바람에 날리는 지폐를 잡으려 허우적거리던 시절,
잡히지 않는 맹수를 잡겠다고 쫓아다니던 시절.
이제 그 모든 시절은 지나갔다.
테니스 코트에서 공을 주우러 다니던 시간도 지나
나는 어두운 새벽에 물을 긷는다.
왜 이 일이 이토록 나를 가슴 벅차게 하는가.
신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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