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가?
술을 마시는 사람들을 오래 바라보다 보면 술이 사람을 망친다는 말이 절반만 맞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무너진 사람에게 술은 마지막으로 손에 쥘 수 있는 도구처럼 보인다.
이혼하고 혼자 사는 A는 늘 취해 있다. 그는 술을 즐기는 것 같지 않다. 취한 상태로 존재하는 것을 선택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맑은 정신으로 견뎌야 할 자기 자신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때, 사람은 의식을 흐리게 만든다. 술은 그를 기쁘게 하지 않고 그를 잠시 덜 느끼게 한다.
A는 사람들과 어울려 마시지 않는다. 식사 대신 소주를 마시고 안주는 필요 없다. 그에게 술은 관계가 아니라 기능이다. 쪼그라든 자아가 알코올을 만나 잠시 정상 크기로 돌아오는 순간, 그는 더 이상 투명한 존재가 아니다.
사별하고 혼자 사는 B의 하루도 비슷하다. 막걸리는 그의 식사이자 시간표다. 종이컵에 따라 마시는 술은
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루를 구분하기 위한 장치처럼 보인다.
아침과 점심, 저녁의 경계가 사라진 삶에서 막걸리는 그에게 남은 유일한 리듬이다.
오징어공장 주인 C는 술을 마시면 며칠씩 사라진다. 그의 몸은 말라 있고 그의 눈빛은 멀다.
앞이 보이지 않는 어머니와 동생 내외와 함께 사는 그는 자기 삶의 중심이 아니다.
술은 그를 현실에서 데려가 의무와 책임이 닿지 않는 곳에 눕힌다.
D는 예술가였다.
기타를 치고 그림을 가르치던 사람은 이제 식당을 거든다. 그가 마시는 막걸리에는 좌절보다 애도가 더 많이 섞여 있다. 되지 못한 자신을 매일 저녁 조용히 묻는 의식처럼.
이들에게 술은 쾌락이 아니다. 자존감이 무너진 자리에 급히 덧댄 임시 구조물이다.
술이 없다면 그들은 하루를 통과하지 못한다.
담배와 술은 그들에게 쌀이나 전기보다 더 생존에 가깝다.
아흔 살이 된 땅부자 영만 할아버지는 술도 담배도 하지 않는다.
혼자 살지만 규칙을 만들고 몸을 쓰고 집을 정리한다. 자식들과 불화가 있음에도 삶의 태도만큼은 단단하다. 그는 외부 물질이 아니라 생활이라는 구조로 자아를 유지한다.
술을 바라보다 보면 아버지가 떠오른다. 아버지는 술을 자주 마시지 않았지만 마시면 병이 날 만큼 마셨다.
그때마다 가족은 고통을 견뎠다.
좌절한 남자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 술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취하도록 마시지 않는다.
그건 건강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아버지와 닮아갈까 두려워서일지도 모른다.
술을 마신다는 건 내 안의 무너질 가능성을 깨우는 일처럼 느껴진다.
며칠 전
술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 찜질방에서 맥주 한 캔을 샀다. 오천 원짜리 맥주를
별맛도 모른 채 마셨다. 맥주를 쏟아가며 글을 쓰기 위해 마시는 술은 도망이 아니라 관찰이었다.
문진서에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체크해 두고 그날 밤 술을 마셨다. 그 작은 모순을 나는 굳이 수정하지 않았다. 사람은 언제나 자기 자신에 대해 완전히 정직하지는 않다.
술은 나쁜 물질이 아니다.
다만 그 사람이 스스로를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지 정확히 드러낼 뿐이다.
울릉도엔 술 마시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지역이 좁아서 환히 보이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