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바다

by 정오의 햇빛

나에게 남은 가장 커다란 의무는 나와 함께 살고 있는 몸을 돌보는 일이다.
몸은 작동할 때마다 삐걱거리고 덜그럭거리고 풀썩거린다.
계속 치료하고, 조이고, 문질러 주어야 하는 존재.
나는 도저히 귀찮아 할 수 없는 나를 살게 하는 몸을 가진 사람이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해야 할 일이 없다. 챙겨야 할 끼니도, 챙겨줘야 할 식구도, 돌봐야 될 건물도, 해결해야 할 계약 문제도, 세입자와의 문제도 없다.
자동차 검사를 해야 하고 여권을 갱신해야 하지만, 그건 내가 할 일이 아니다.
주식을 관리할 일도, 코인을 살펴야 할 일도 없다.


배가 고파지면 일어나 배추 우거지를 삶아 먹고, 도시락을 싸서 공원으로 나간다.
추위에 떨며 차가운 음식을 먹고, 도서관에 가서 몸을 녹이며 책을 읽는다.
그러다 시간이 되면 알바를 가서 김밥 삼십 줄을 말고 온다.


웃음이 날 만큼 좋다.


언젠가는, 하고 싶은 일이조차 없는 이 상태가 괴롭고 적막하며 허무하게 느껴진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아무것도 해야 하지 않는 이 상태가 너무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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