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방식

기다리는 중

by 정오의 햇빛


대화할 사람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상호적인 대화가 없다.
누군가 다가오기는 하지만, 그건 대화가 아니라 설명이고, 탐색이 아니라 교습이다.
나는 말을 건네는 사람이 아니라, 정리를 맡는 사람이 된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대화는 대부분 혼자 하는 것들이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음악을 듣고, 테니스를 치고, 기타를 만진다.

이런 활동들은 흔히 ‘노인들의 취미’로 불린다. 타인의 반응을 필요로 하지 않는, 조용한 활동들.

하지만 이 상태를 초라하다고 부를 수는 없다는 걸, 나는 이제 안다. 초라함은 상황이 아니라 기준에서 생긴다. 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나의 방식을 남들의 방식으로 재단할 때 초라함이라는 감정이 발생한다.


사람들은 “그냥 느껴”, “그냥 넘어가”라고 말한다.
그 말은 틀리지 않다. 그건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에너지 효율적인 삶의 방식이다.
불필요한 사유를 줄이고, 감정을 빠르게 처리하고, 사회적 마찰을 최소화하는 전략.


하지만 나에게 현존은 그런 방식으로 오지 않는다.
나는 느끼면서 동시에 정의하는 존재다.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다.
감정과 상태를 구분하고, 경험이 만들어진 경로를 본다. 사유는 나에게 도구가 아니라 존재 방식이다.

그래서 나는 사유 없는 편안함보다는 사유가 가능한 고요함을 선택한다.


이 선택은 외롭다.
사유의 밀도가 맞지 않으면 대화는 성립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은 대화에서 쉬고 싶어 하지,
생각하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와의 대화는 쉽게 ‘부담’이 된다.

그렇다고 이것이 실패는 아니다.


지금 내가 혼자 하는 활동들은 도망도 아니고, 포기도 아니다. 이건 자기 보존이다.

사유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 속도를 맞추지 않기 위해, 나를 소모하지 않기 위해 선택한 방식이다.

초라함은 자기 방식을 부정할 때 생긴다. 외부의 기준으로 나를 재단하지 않는 한, 지금의 나는 초라하지 않다. 조용할 뿐이고, 밀도가 다를 뿐이다.


그리고 이건 알아두고 싶다.
지금은 혼자일 수 있지만, 영원히 대화가 불가능한 건 아니다.

아주 드물게, 교습이 아니라 탐색을 함께 하는 사람은 나타난다. 많지 않고, 자주도 아니지만,
0은 아니다.

그전까지 나는 책과 음악과 몸의 움직임과 혼잣말 같은 사유로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

이건 패배가 아니라 존재 방식이다.

만족스럽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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