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공에 외치는 이름들
죽어가면서 이름을 부른다는 것.
이 영화를 나는 이렇게 기억하게 될 것 같다.
참혹한 전쟁 영화였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영화 내내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다. 화면은 끔찍했는데, 음악은 잔잔하고 무심했다.
오래전부터 나는 이런 장치를 알아차려 왔다. 시각적 자극이 극단에 이를 때, 청각은 오히려 진정의 역할을 한다는 것. 만약 두 감각이 동시에 끝까지 몰아붙여진다면 우리는 견디지 못하고 토해내듯 자리를 떠날 것이다. 감독은 관객이 뛰쳐나가기를 원하지 않는다. 끝까지 보기를 원한다.
그래서 영화는 자극과 진정을 동시에 건넨다.
영화 속에는 사기꾼이 등장한다. 그는 원래 독립운동가도, 항일투사도 아니었다. 투사의 이름을 사칭하다 잡혀온 인물이다. 그런데 그 이름을 뒤집어쓰고 살아가는 동안, 그는 점점 그 이름에 걸맞은 사람이 되어간다. 죄수들의 고통을 중재하고, 약자를 돌보고, 결국엔 타인을 위해 자기 몸을 내어놓는다. 이름이 사람을 만들고, 역할이 인간을 변화시키는 순간이었다.
이 영화가 더욱 견디기 힘든 이유는, 그 지옥 같은 공간 안에 우리가 아는 삶의 얼굴들이 그대로 있기 때문이다. 소년과 소녀, 노인과 아저씨.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사람들. 그들은 실험 대상이 된다. 패스트균의 전파력을 실험하기 위해 묶여 세워지고, 실험이 끝난 뒤에는 모두를 처리하기 위한 거대한 구덩이가 파여 있다. 살아서든 죽어서든 그곳으로 몰려간다. 석회가 뿌려지고, 몸은 폐기물처럼 처리된다.
그런데 그 구덩이 안에서 믿기 어려운 장면이 펼쳐진다. 어차피 나와도 죽는다. 일본군이 둘러싸고 있다. 5분 후면 모두 죽을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벽을 타고 기어오른다. 서로의 몸을 디디고 인간 사다리를 만든다. 그리고 가장 어린 소년을 위로, 더 위로 밀어 올린다. 단 한 명이라도 구덩이 밖으로 내보내기 위해서.
하얀 석회에 뒤덮인 채 죽어가던 사람들이 벽에 붙어 아이를 들어 올리는 그 장면은, 설명할 수 없이 마음을 무너뜨렸다. 결국 아이는 구덩이 밖으로 나오지만 총에 맞아 다시 떨어진다. 이미 감염되었고, 살아 나와도 곧 죽을 것이 분명한 그 아이의 손을 사기꾼은 끝까지 놓지 않는다. 그 역시 곧 죽을 것을 알면서도.
이 모든 행동은 결과를 남기지 않는다. 아무도 살아남지 못한다. 성공도, 성취도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삶을 향해 몸을 던진다. 그리고 그때, 사람들이 죽어가며 외친다. 비명이 아니라 이름을.
“나는 누구다.”
“나는 김수자다.”
“나는 아무개다.”
그 장면 앞에서 나는 말문이 막혔다. 왜 이름을 부를까. 누구에게? 들어줄 사람도 없는데. 곧 사라질 텐데.
억지로 말을 만들어보자면, 이것에 가까웠다.
“나는 지금 여기서 죽지만, 분명히 여기에 있었다.”
존재가 스스로를 배반하지 않기 위해 내뱉는 마지막 언어였다.
새는 자기 이름을 부르며 날아간다더니 사람들은 자기 이름을 외치고 죽어간다.
누군가에게 들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주에 자신을 신고하듯. 집에 처음 들어와 “다녀왔습니다”라고 말하듯. 사라지는 존재가 아니라, 분명히 존재했던 존재였다는 선언. 몸은 소멸하지만, 이름은 흔적을 남긴다.
영화 속 대사처럼, 사람이 죽어도 그 이름을 기억하는 한 그 사람은 마음속에 살아 있다. 하지만 이 장면은 기억을 요청하는 장면이라기보다, 존재를 스스로 증언하는 장면처럼 보였다.
이 영화를 보며 내 안의 어떤 생각이 무너졌다.
어차피 죽을 건데 왜 저렇게까지 하나. 의미도 없고, 결과도 없고, 가치도 남지 않는데.
그건 내가 삶을 너무 계산적으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삶을 결과로 판단하고, 전수 가능한가, 가치가 축적되는가, 의미가 남는가로 재단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말한다. 삶은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고. 의미가 남지 않아도, 결과가 없어도, 삶은 마지막 순간까지 삶을 향해 움직인다고. 그래서 이 영화는 다큐전쟁영화이면서 동시에 신화처럼 느껴진다. 〈인생은 아름다워〉가 신화인 것처럼.
삶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계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신화.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몸부림. 그러나 그 무의미 속에서, 인간은 끝까지 인간으로 남는다.
그것을 나는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다.
구제역의 돼지들이 생매장당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구덩이에서 절망의 바닥이 아니라 삶의 원형을 본 느낌이었다. 삶이 가장 잔인한 조건에 놓였을 때 오히려 삶이 무엇인지가 가장 또렷해지는 아이러니.
그런 화면과 마음을 달래주는 잔잔한 음악은 공포로 도망가지 않고 끝까지 보라고 하는 무거운 요구로 들려왔다.
삶은 아름다운 것도 잔인한 것도 아닌 설명되지 않는 끝까지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그 스스로의 숭고한 생명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