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언제 시작되는가

그 감정은 네가 아니다.

by 정오의 햇빛

삶은 자기 비난, 혐오, 자기모멸, 자기부정이 없는 상태에서 비로소 시작된다.

그 감정들은 자기가 자기를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다. 그것은 외부의 시선을 내면화한 눈이다.

그 눈으로 살아가는 삶은 자신의 자신됨을 인정하지 못한 꼭두각시의 삶이다.

꼭두각시는 자기 의지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가 나타나면, 마음껏 흔들린다.

할 수 있든 없든, 견딜 수 있든 없든 상관없이. 꼭두각시는 팔이 떨어져 나가도, 다리가 부러져도, 목이 잘려 나가도 그의 손끝에 매달린 채 계속 흔들린다. 그 어떤 성취도 꼭두각시의 능력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힘이 지나간 흔적일 뿐이다.


때로 꼭두각시는 던져진다. 먼지 속에 방치된 채, 구겨지고 낡아가며 다시 그가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꼭두각시에게 삶은 없다. 꼭두각시는 후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전진도 하지 못한다. 매달린 채 왔다 갔다 하는 공간에서 그저 덜렁거릴 뿐이다.


자기 비난과 자기모멸은 나를 봐주는 시선이 없어서 깊어진다.

나를 바라보는 다른 시선이 없어서, 나를 무한히 수용하고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없어서

그 감정들은 점점 깊어진다.

깊어지고, 더 깊어지고, 마침내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지점까지 깊어진다.

그러나 아무리 깊어져도 자기혐오만으로 죽음에 도달할 수는 없다.


병들어 죽을 수는 있을지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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