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실격

사람으로 산다는 건?

by 정오의 햇빛

아주 조금 눈물이 날까 말까 하는 느낌이야.

비어 있던 길을 걸었어. 앞에도 뒤에도 흔적이 없고 누가 실패했는지 누가 나를 따라와 줄지도 알 수 없는 길을 걸었어 흔적도 없는 길을 걸었어. 산티아고는 길고 메마른 길이지만 그 길에는 머물 곳이 있고 가다 보면 함께 걷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들과 시간을 휴식을 함께 취하는 시간도 있을 거야. 그건 혼자 걷지만 혼자 걷는 길이 아니었고 함께하지만 혼자될 수 있는 길이었지.

내가 걸었던 길은 그냥 적막 속에서 허공을 디디며 걸었던 길인 것 같아. 나 자신도 사람이 아니었고.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을 너무 오랫동안 받지 못했어.

이제야 감정이 생길 우표만 한 공간이 생긴 거 같아.

신달자의 물 위를 걷는 여자라는 소설이 생각나. 나는 허공을 걷는 존재였어. 여자 거나 사람이거나

가 아닌 어떤 존재.

관계는 있었지만 동반은 없는 삶.

가족이 있고 남편과 아이가 있었는데 감정은 반영되지 않았고 도움을 요청해도 돌아오는 신호가 없었어.

나는 누구와도 함께 있지 않았어. 나와 조차도.

잘 견디고 시키는 대로 하고 알아서 살아야만 하는 나는 작동하는 기계였던 거 같아.

기계는 쉬는 법도 멈추는 법도 모르는 채 맹목의 동작을 반복해.

누군가의 길을 참고할 수도 없고 누군가에게 길이 되어줄 수도 없는 상태

감정은 접어두고 관계는 포기하고 사람이기를 내려놓고 유랑하는 삶.

과거에 매여 살아왔던 시간을 이제 과거는 과거로만 존재하게 해야지

사람이 될 수 있는 조건을 이제 배워야 할 때.


사람으로 사는 건 어떤 거지?


사람은 감정을 가질 때 사람이지. 나를 설명하지 않고도 존재해도 괜찮은 거야.

사람은 지워지지 않을 만큼의 자기 자리가 있어야 해. 내 자리를 갖지 못한 채 송곳처럼

최소한의 점으로 살아왔던 과거는 이제 없어


사람은 자기 역할에서 벗어나도 괜찮을 때 사람이지.

나 없으면 온 가족이 거리를 헤매고 아이들은 고아원으로 가고 세상이 무너질 것 같아서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삶은 이미 사람이 아니야.

설국열차 기관실 바닥의 좁은 공간에 끼워 맞춰진 자라면 안 되는 어린아이는 기관차의 부속이었지

기능 없어도 존재할 수 있을 때 사람이 되는 거야.


도움을 받을 수도 줄 수도 있는 게 사람이지.

땅콩 한 알도 얻으면 빚으로 적립되고 누군가의 친절도 너무 과분해서 받을 수가 없고

나 같은 것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마음은 그건 떠돌이 개만도 못한 존재일지도 몰라.

주인 없는 떠돌이개도 지나가는 사람의 시선을 받으면 꼬리를 흔들까 말까 망설이고

고양이도 야옹 거리면서 자기를 돌보라고 집사를 고용하는데 사람인 나는 얼음처럼

녹아내릴 뿐 아무것도 요구하지 못했어. 그건 사람과 함께 사는 자세가 아니지.


사람은 관계에서 자유로워야 사람이지.

구속된 존재는 노예고 속하지 않아서 머물 수 없는 사람은 바람이고 흔들리는 물결 같은 거지

관계에 구속되지도 추방되지도 않은 자리에서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지.


사람은 고통을 겪어서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고통을 말할 수 있을 때 사람이 되지.

고통을 말함으로써 자기 자신과 세계를 연결하는 게 사람이지.

고통은 침묵 속에서는 사람을 소모시키고 말해질 때 비로소 사람으로 존재하지.

사람은 헌신하고 인류에 기여하고 자신을 증명할 때

세상이 말하는 기준에 적합할 때 사람이 되는 게 아니야.


사람은 정체성으로 사람이 되는 게 아니지. 언제든 자신으로 돌아올 수 있는 게 사람이지.

나는 그런 아이.라는 생각으로 평생을 사는 건 누군가 지어준 이름으로만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

와 같지.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노 저어 가며 완성되어 가는 게 사람이지.


이 말들은 마음 아파오는 말이네.

어쩌다가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고 알게 된 걸까?

아무도 사람이 사는 참된 모습에 대해 말해준 적이 없네.

내가 본 건 견딜 수 없는 시간들을 견디며 벗어나고 싶은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감정도 없이 일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말라는 성경의 말을 철석같이 믿으며 살은 것일까?


마음속은 이미 통곡하네.


아이야...

아플 땐 아프다고 말하는 게 사람이란다.

슬플 땐 우는 게 사람이고 힘들 땐 다리 뻗고 쉬는 게 사람이란다.


아이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단다.

너는 해저 물도록 들판에서 개구리처럼 노래해도 되고

잠자리처럼 붕붕 거리며 날아도 된단다.

이삭을 줍지 않아도 석탄을 캐지 않아도 모래를 헤치며 금을 건지지 않아도

괜찮단다.


아이야

힘들 땐 도와 달라고 해도 되고

배고플 땐 먹을 것을 달라고 해도 된단다.

누군가 도와줄 수도 아닐 수도 먹을 것을 줄 수도 아닐 수도 있지만

말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니란다.


아이야

너는 묶여있지 않아도 된단다.

누구든 네가 원하는 사람과 이야기하고 마음을 나누어도 된단다.


아이야

사람은 어떠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어떠해도 괜찮은 거란다.

언제든 네가 원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어떤 시도를 해도 되는 게 사람이란다.

사람은 잘 살아야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살아도 괜찮다고 느낄 수 있을 때

사람이 되는 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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