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의 입장에서는 갓 뗌
험난한 길을 지나 마을에 도착한 목사.
가는 여정에서 사람이 죽고,
목사는 홀로 믿음의 십자가를 세운다.
목사는 형식에 집착한다.
교회가 완공되지 않아 주례를 설 수 없고,
예복이 더럽혀지면 예배는 불가능해진다.
종교에, 국가에, 어른들에게
고개 숙일 일은 아니다.
사진은 예술이자 권력이다.
카메라 앞에서 남자는 죄를 고백한다.
목사는 렌즈를 통해 남자의 죄를 듣다가 분노하고,
죄를 고백하던 그 남자를 죽인다.
목사는 병약해 보이는 얼굴과
꼬챙이 같은 다리를 가졌다.
무력해 보이지만, 결정적인 한 방을 아는 사람이다.
그건 격투 기술이 아니라
상대를 끝장내는 방식을 아는 감각이다.
빈약한 몸으로 상대의 몸에 매달려
대롱대롱 견뎌내다 결국 이겨내고,
도저히 이길 수 없어 보이던 원주민 남자를
뒤통수를 깨 죽인다.
그 장면은 종교의 폭력성을 보여주는 듯했고,
문명인이 자연과 원주민을 대하는 태도를
드러내는 장면처럼 보였다.
교회가 완공되고 첫 예배가 시작되지만
갓난아이는 품에서 울고,
문밖에서는 개가 짖는다.
그의 신앙은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완성된 구조와 질서, 형식화된 신을 위한 믿음이다.
통제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신의 말씀은 시작조차 되지 못하고,
목사는 말을 타고 그 자리를 떠난다.
소녀의 아버지가 목사를 찾아 나선다.
그는 목사를 칼로 찌르며 말한다.
“너는 말에서 떨어졌어야 했어.”
그 말은 이렇게 들린다.
너는 신의 대리인이 될 자격이 없어.
봄이 오고, 들판의 죽은 말은 새들을 살리고, 목사의 주검 옆에는 꽃이 피어난다.
소녀는 노래한다.
괜찮다고, 꽃은 피어날 것이고 얼마나 아름답겠느냐고.
마치 한 편의 길고 긴 영상시를 본 것 같다.
목사의 모습은 신의 부름을 받은 소명자라기보다 갑자기 오지에 던져진 문명 세계의 어린아이처럼 보인다.
어린아이는 초현대적 오락기인 사진기와 강력한 아이템인 ‘신’을 업고 등장하지만,
자연 속에서는 오락기도 아이템도 무용해진다.
자연과 발맞춰 살아가는 인간만이 그곳에서 살아남는다.
목사는 목사로서도, 변방의 주민으로서도 적응하지 못한 채
안락한 환경에서 유배된 한 남자로 생을 마친다.
영화를 보고 찾아보니 아이슬란드는 덴마크의 오랜 통치를 받은 나라였다. 무려 오백 년.
풍부한 자원을 가진, 부유한 나라다.
덴마크는 왜 목사를 아이슬란드로 보냈을까.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정신적 종속을 시도한 것은 아니었을까.
덴마크의 권력을 수행하기 위해 보내진 존재였을까.
그 시도는 불을 뿜는 산과 얼음과 눈을 내리는 자연 앞에서 무력해진다.
그들은 천국도, 목사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이미 자연의 품 안에서 천국의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연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