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우스 메이드

백설공주와 신데렐라의 다른 버전

by 정오의 햇빛

교도소에서 10년을 복역하고 5년의 가석방 기간을 보내는 젊은 여자가 있다.

그녀는 어느 집에 가정부로 취직한다. 그 집의 안주인은 조현병 증세를 보이고, 영화는 유난히 이 주인 여자에게 시선을 오래 머문다. 제목이 *하우스메이드*라서 또 하나의 ‘할리우드식 하녀 서사’인가 싶었는데, 영화는 내가 예상한 방향으로는 흘러가지 않았다.


주인 남자와 가정부는 호사스러운 공연을 보고,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그 사이 조현병을 앓는 주인 여자의 증세는 점점 심해진다. 보는 내내 불안하고 조마조마했다. 가석방 중인 이 여자의 인생이 어떻게 될지 걱정이 앞섰다. 집 안에 있는 딸의 분위기도 묘했다. 천진난만한 아이의 얼굴이 아니라, 어딘가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듯한 표정.


영화를 보는 내내 *이 이야기를 대체 어디로 끌고 가려는 걸까?*가 궁금했다.


서론은 길다. 긴장도 길게, 아주 지루하고 성실하게 쌓인다. 그러다 느닷없이 시어머니가 등장한다. 그 시어머니의 분위기는 한 단어로 말하면 ‘마녀스럽다’. 집주인 남자는 계속해서 매력적인 남자의 얼굴을 유지한다. 친절하고, 단정하고, 사회적으로 잘 기능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여전히 불안하다. 내가 아는 방식으로 전개되어서는 영화가 안될텐데...

“어떻게 하려고 이러지?”

“대체 언제 터질까?”

이 질문을 계속 쌓아 올린다. 상영 시간도 길다. *하우스메이드*라는 제목과 어울리지 않게 두 시간이 훌쩍 넘는다. 하지만 그 모든 시간은 임계점을 향해 축적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동안 꽉 막아 두었던 본물이 터지듯, 영화는 종반을 향해 폭주한다.

느린 영화가 갑자기 빨라지는 게 아니다.

마치 봅슬레이가 얼음 트랙 위를 총알처럼 미끄러져 내려가듯, 이미 준비된 궤도를 따라 단호하게 질주한다. 앞부분의 느리고 조심스럽고, 친절하고 다정하면서도 광기 어린 장면들이 한순간에 호러로 변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전개가 터무니없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동안 너무 착실하게 긴장을 쌓아 올려왔기 때문에, 나 역시 그 속도에 그대로 몸을 싣고 달리고 있었다. 머뭇거림도, 망설임도 없이.


영화가 끝났을 때 느껴진 감정은 **시원함, 통쾌함, 후련함**이었다.

그건 사건이 통쾌해서가 아니라, *너무 오래 막아 두었던 무언가를 툭 하고 터뜨려 줬기 때문*에 오는 해방감에 가까웠다.

놀라운 건,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내가 판단을 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조현병 증세를 보이는 주인 여자를 보면서도 역겨움이나 비난이 솟아오르지 않았다.

“어우, 저걸 어떻게 하려고 저러지?”

“이게 어떻게 되려고 이러는 걸까?”

그 정도의 거리감으로만 바라보고 있었다.


가정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교도소에서 10년을 살다 나온 여자임에도,

‘나쁜 사람’, ‘엮이면 안 되는 사람’이라는 꼬리표를 붙이지 않았다.


등장인물들을 내 기준으로 줄 세우지 않고,

그저 각자의 위치에 그대로 놓아둔 채 보고 있었다.


그리고 영화 후반,

주인 남자의 진짜 얼굴이 드러나는 순간에도 나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저 사람이 사이코였네.”

“저 사람이 다 망쳐놨네.”

오히려 떠오른 생각은 이것이었다.

아, 이 사람이 가장 큰 피해자구나.


아내도, 가정부도, 적어도 ‘선택’이라는 것을 할 수 있었다.

누구와 결혼할지, 어느 집에 들어갈지, 어떤 삶을 살지.

그러나 이 남자는 선택할 수 없는 삶을 이미 시작한 채 태어났다는 느낌이 들었다.

장례식 장면에서조차,

어머니는 죽은 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빨은 소중한 건데, 간직할 능력이 없으면 없어져도 괜찮다.”

야단도, 위로도 아닌 그 말은 아들이 평생 맞춰왔던 세계의 압축본처럼 느껴졌다.


아주 오랜 세월 동안,

그는 어머니의 비위를 백 퍼센트 맞추며 살아왔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타인에게도, 아내에게도 자기를 백 퍼센트 맞춰달라고 요구하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여자도 누군가에게 백 퍼센트를 맞출 수는 없다.

각자는 이미 자기만의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노력은 할 수 있지만, 완벽한 일치는 불가능하다.


이 영화는 누가 나쁜지, 누가 잘못했는지를 가르치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묻는 것 같다.

우리는 과연 어디까지 선택할 수 있는 존재인가.

그리고 선택할 수 없었던 삶은, 누구의 책임인가.

관객을 답답하게 만드는 데 매우 성실한 영화다.


다 고통을 겪는 존재들만 있었어

끝나고 나서, 그 엄마를 욕할 수가 없었다.

그 엄마에게 삶은 완벽해야 하는 것이었고, 거의 그런 삶을 살아낸 사람처럼 보였다.

그 완벽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긴장하며 살았을까 생각하니, 차마 손가락질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 방식으로밖에는 살 수 없었던 사람.

그 엄마는 아마 다른 삶을 상상해 본 적조차 없었을 것이다.


아들은 선대가 마련한 사업을 물려받아 풍족하고 멋진 남자로 살아간다.

사회적으로 보자면 성공한 인생이다.

하지만 그 성취는 엄마가 원했던 아들을, 엄마가 원하는 방식으로

백 퍼센트 완성해 낸 결과이기도 하다.


그건 또 얼마나 힘든 일이었을까.

아들을 그렇게 만들어 낸 엄마도, 그렇게 만들어져야 했던 아들도.

그 엄마의 삶이 이미 그러했는데 어떻게 그 사람에게 “다른 사람이 되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 엄마는 마치 731부대의 책임자처럼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을 아주 성실하고 충실하게 수행한 사람 같았다.

그 안에서는 누구도 명백한 가해자라 부를 수 없었다.


그저 모두가 고통을 겪는 존재들만 있었다.

그 모든 걸 보고 나서 이상하게도 묘한 후련함이 남았다. 영화가 후련한 건 절대 아니고 쌓아온 긴장이

해소된 후의 후련감일 것이다.


문득 생각이 났다.

백설공주, 신데렐라, 엄지공주.

예전 동화 속 여자들은 결혼을 통해 신분을 상승시키는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본 이 영화들 속 여자들은 무언가를 얻기 위해 선택되는 존재가 아니라

무언가를 끝내기 위해 선택하는 존재들이었다.


없애고, 정리하고, 멈추게 하는 역할.

영국의 찰스 왕 이야기가 스쳐 지나간 것도 아마 그런 맥락이었을 것이다.

자기를 지켜내는 데 성공한 한 인간의 모습이 유난히 또렷해 보였던 이유.

여기까지 쓰고 보니 이 글에는 결론이 없다.


누구를 비난할 수도 없고 누구를 영웅으로 만들 수도 없다.


글을 마치는 순간까지 스쳐가는 사람 또 하나.

삼성의 이재용이 이혼하고 재혼하지 않으며 남긴말

부모의 기대에 맞는 사람을 찾는 것 보다 혼자 사는 선택이 낫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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