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력벽을 넘어
나는 중력벽을 통과해서 우일구로 왔다.
내가 우일구에 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여전히 장년구에서 살던 습성이 남아 있다.
아직 뭔가 허우적거려야 할 것 같은 습성.
그런데 오늘 영화를 보면서 알았다.
아, 나는 우일구로 넘어왔구나.
우일구사람들은 장년구의 사람들과 함께할 수 없다.
시간 개념도, 삶의 방식도 다르기 때문이다.
영화는 그것을 확실히 알려주었다. 더 이상 저쪽으로 돌아가려고 애쓰지 마.
나는 이미 우일구에 와 있다.
우일구에서 살아가면서, 우일구에 있다는 사실을 자꾸 잊고 있었던 것이다.
장년구에 누가 있든, 무엇이 있든, 돌아갈 이유는 없다.
오늘 아침 꿈 이야기도 같은 맥락이다.
중력벽은 고통을 겪으면서 넘어왔다.
지연이와 함께하는 삶에서, 이제 각자 사는 삶으로 분리될 때 불타는 중력 속에서 죽음을 감수하고 건너온 것과 같다.
장년구에서는 삼백육십오일 노동과 병과 궁핍과 모진 가혹함이 있다.
하지만 내가 건너온 우일구에는 그런 것들이 없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고통을 삶의 조건으로 살아야 했을까?
많은 깨달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했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도 삶의 조건을 바꾸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고통이 사라지면 삶도 사라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도 그랬다.
암 수술을 하며 전신마취 상태로 죽음과 유사한 경험을 했다.
지금도 암에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는 아니다.
그 모든 체험을 겪고 나서야, 미미하게나마 달라진 감각이 생긴다.
그리고 영화 속 장면을 보면서 확실히 깨닫는다.
아, 이거였구나, 하고.
그동안 의식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깨달음은 단순한 체험의 결과가 아니라,
오랜 시간 습성과 경험 속에서 천천히 자리 잡는 체감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자리를 확인했다.
나는 건너편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