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터 슬립

잠자는 동안 흐른 사유를 떠올린 글

by 정오의 햇빛

윈터 슬립

영화는 아주 느리게 진행되었다.


너무 느려서, 마치 영화를 2분의 1배속 혹은 3분의 1배속으로 돌리며 한 장면도 놓치지 말라고 하는 느낌이었다.

이 영화는 예전에 한 번 본 것 같았다. 내용은 생각이 안 나고 눈 덮인 산속 마을의 이미지만 기억난다.


별 느낌 없이, 감정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 채 봤던 기억뿐이었다. 사실은 본 건지 아닌지도 확실하지 않다.

이번에는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보일 듯 말 듯했다.


그중 통쾌한 장면 하나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지주의 젊은 부인이 거액의 돈을 들고, 남편에게 감정적 고통을 당한 사람, 고통을 겪은 아이의 집을 찾아갔다. 아이의 아버지는 빚도 있는 가난한 사람이었고, 거액의 돈에 갈등하는 듯 느껴지기도 했다.

그때 형이 들어와 돈의 의미를 정리했다.


“이것은 적당한 액수다”라며 그 돈뭉치를 들고 벽난로 안으로 던져버렸다.

거액의 돈은 순식간에 재가 되었고, 지주의 부인과 그 남자 모두 눈물을 흘렸다.


우엥?

지주 부인은 왜?

우엥?

돈을 태운 남자는 또 왜?


그 장면이 너무 감동적이었다.

우리는 종종 타인의 고통을 물질로 보상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국가는 보상을 돈으로라도 해결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장면은 말한다.

고통은 물질로 보상하거나 대체할 수 없다.

손상된 영혼은 오직 손상된 영혼으로만 회복될 수 있으며, 불분명한 돈으로는 결코 치유될 수 없다는 것을.

지주의 부인이 우는 장면을 보면서도 느낀 것이 있다.


남편의 폭력적인 정서적 또는 물리적 행위를 비난하면서도, 그녀 역시 같은 구조의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남편이 주먹으로 폭력을 행사했다면, 그녀는 황홀하고 달콤한 방식으로 상대의 영혼을 망가뜨린다.


자신이 가치 있다고 믿는 돈으로 상대의 고통을 계산하는 순간,

다른 방식의 같은 폭력의 구조가 거기에 있다고 보았다.


관객들은 돈이 불에 타는 장면에서 안타까운 신음소리를 냈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저들은 저 돈이 갖는 의미를 모르는구나.”


그 장면은 안타까움이 아니라 통쾌함이었다.

고통은 돈으로 계산될 수 없다는, 정의와 감정의 무게를 보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근데 정말 의외였다.

가난한 마을에 빚진 남자가 집 한 채 값의 뭉텅이 돈을 불타는 벽난로에 마치 넝마조각을 버리듯

던져 넣는 장면에서 나 홀로 통쾌해하는 나의 모습이.


이 통쾌함은 세상을 속박하는 가치와 규칙을 넘어서는 순간에 오는 카타르시스와 같았다.

그 순간 나는 나를 다시 보았다.


오~

영화 좀 보는군요

스스로에게 감탄하며 영화를 보는 나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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