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도 사고파는 세상에.
타인의 고통을 내가 정한 가치 체계로 대체 정리 처리하는 순간부터 인간은 개체화된다.
존재에게 일어난 손상은 돈으로 환전되지 않고 사과로도 선의로도 지워지지 않는다.
돈이 불타는 장면을 물질의 손실로 보면 안타까운 일이고
존재의 존엄을 지키는 선택으로 보면 통쾌하다.
지주 부인의 존엄은 그 순간 재가 되고 빚진 소작인 남자는 존엄함을 지켜낸다.
존엄이 무너지는 자리는 인간임을 포기하는 자리이고 물질을 물질로 돌려보내는
행위는 인간은 물질만으로 이뤄진 존재가 아님을 증명한다.
사람들은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흔히 합의라는 방식을 택한다.
“내가 이만큼의 돈을 지불할 테니, 내가 너에게 가한 범죄를 사해 달라.”
이런 거래가 이루어진다.
사람들은 그 제안을 거부하지 않는다.
이미 고통은 발생했고, 무엇으로도 고통 이전으로 되돌릴 수는 없다.
그렇기에 돈이라도 받아야 한다고 스스로 합리화한다.
하지만 문제는, 합의금이 고통을 덜기 위해서도, 존엄을 회복하기 위해서도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 돈은 단지 자신의 고통을 물질적 가치로 환산해 돌려받는 일일 뿐이다.
고통이 측량 가능하고, 대체 가능하며, 보상이 가능한 것으로 변질되는 순간,
우리는 이상한 윤리적 논리에 빠지게 된다.
“인간에게 고통을 가해도 된다. 가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보상이 가능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마치 오백 원을 빼앗았으니, 오백 원을 돌려주면 된다는 식이다.
“너의 존엄의 가치는 얼마이니까, 그만큼 주면 되는 거지?”
이 순간, 윤리는 붕괴한다.
이 논리가 허용되는 순간 폭력은 부유한 사람에게만 허용되는 권력이 된다.
존엄은 거래의 대상이 되는 순간 이미 허물어진다.
존엄은 계산되지 않고 흥정할 수도 없고 합의로도 회복될 수 없다.
보상을 거부함으로써 고통이 상품이 되는 것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며
돈 앞에 신장도 팔고 눈알도 파는 세상이지만 존엄은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허물어진 윤리가 부스스 일어나 자세를 잡게 만드는 영화였다.
나의 존엄은 어디를 헤매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