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라온 빌리지에서

by 정오의 햇빛

6:00

각성된 나.

글을 쓰면서 변화를 느낀다.

생각은 구름이고 글은 대지에 내리는 비다. 대지에는 이미 씨앗이 가득하고

때가 되면 적당한 순간에 싹이 튼다.


비가 없으면 싹트지 못한다.

씨앗은 가능성일뿐 결과가 아니다.


아침부터 집에서 영화 직장상사 길들이기를 정리했다.

어찌나 시간이 걸리는지 이게 다 뭔 뻘짓일까 하는 생각도 든다.

갑자기 지금 글쓸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운동을 해야지 무슨 글나부랑이를...

너에게 지금 닥친 문제는 기립능력이지 타자능력이 아니잔아?


8:00

뜨끈한 우거지 국.

이렇게 맛이 있다니...

맨날 된장국만 먹다가 돼지 등뼈 한토막 넣고 끓인 고기국에 눈물이 날 지경이다.

근데 뼈 우거지 국은 그만 해야 겠다. 뼈 발라 먹기가 힘들어서.

아침은 이제 집에서 먹고 나가야겠다.

무슨 청승으로 세끼를 딱딱한 김밥을 먹으며 돌아다닌단 말인가?


9:00

테니스코트에 왔다.

천개의 공을 치려면 두시간이 필요하다.


11:00

서재에 도착해 겉옷을 다 벗고 편안한 차림으로 앉았다.

직장상사 길들이기를 마저 쓴다.

날마다 새로운 이야기거리가 쌓여서 문제다.

이야기거리를 만들어내지 말아야 하는데 하루를 살면 일주일치의 이야기가 쌓이고

운동할 시간도 없이 글을 써도 다 소화하지 못한다.

이거 뭔가 방법이 필요하다.


12:08

어제 일기와 오늘 지금까지의 일기를 썼다.

날마다 일기를 빠트리지 않고 싶다.

한 줄이라도 그날의 일기를 쓰고 다음날 어제 일기를 덧붙이기로 했다.


12:57

책상에 앉아 김밥을 먹었다.

점심먹을 시간도 아껴가면서 글을 쓴다.

왜 이리 바쁜거지?

시한부 선고라도 받은건가?


1:52

드디어 오늘치의 집중력을 다 쓴 것일까?

밥을 먹어서 식곤증인가?

눈꺼풀이 점점 발등을 향한다.

오! 사과를 발견한 순간 잠이 깬다.

냠냠

한시간은 더 버틸 수 있겠다.


3:05

노트북 시계와 핸드폰 시계가 1시간 차이가 난다.

졸지에 1시간을 잃어버린 기분이다.

졸다가 사과 한개를 먹었는데 ..시간이 휙 점프했다.

어이 없네.

노트북에 문제가 있는거 같음.


3:41

일기를 올리고 이제 알바 갈 시간.

화장실도 안 가고 있다.

이게 이리 재미있는 일인건가?

더 재미있는 일은 없으려나?




어제 일기

9:00

따뜻한 우거지 국을 먹었다. 행복했다.


10:00

라온 골프장에 딸린 빈 아파트에 가서 혼자 청소를 했다.

아무도 없는 빈집은 추웠고 오래 온기가 없어 황량했다.

호사스럽지만 썰렁한 곳에서 청소를 하다보니 신데렐라가 된 기분이었다.

7순의 신데렐라.

한참 있다보니 조금전의 나와 한참 전의 나와 아까의 나와 중첩된 시간속의 내가 가득해졌다.

공간이 익숙해진다는 것은 보이지 않지만 조금전의 내가 지금의 나와 만나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4:00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멀었다.

한라도서관에서 글을 쓰는데 피로감이 몰려왔고 집에 가서 쉬고 싶었다.


7:40

집에 오니 여왕이 된 기분이었다.

아름다운 풍경과 고급스러운 가구와 명품옷이 있는 빌리지 라온의 공간감과는 비교할 수 없는

나의 숨결로 가득찬 좁고 재활용품과 당근에서 얻어온 옷들이 자리하고 있는 나의 집.

거의 재활용품 보관소와 다를게 없지만 나에게 주는 이 충만감은 무엇과 비교할 수 없다.


김숙연과 통화했다.

하루종일 물건들과만 지내서 사람의 목소리가 그리웠다.

영화본 이야기와 나의 국가공인자격증을 자랑했다.

유일하게 자랑할 나의 국가 공인자격은 노인이 된거.


9:00

무얼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잠들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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