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삶에 말 걸어올 때
따끈한 아침식사를 9시에 집을 나섰다.
9시 11분 테니스장에 도착했다. 이제 두 시간 연습을 하고 서재로 갈 것이다.
4시에 김밥 알바 갔다가 집에 올 것이다.
밤에는 영화 넘버원을 보러 간다.
오늘의 일정이다.
반복되는 날들은 지루하고 멸렬하다고 생각했다.
행복은 새로움 속에 있다고 믿었다.
그래야 도파민이 분출되고 살아있는 느낌이 든다고 생각했다.
ADHD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오늘 생각이 바뀌었다.
행복은 반복 속에서 형성된다.
날마다 같은 분량의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행복감을 맛보다 보면 그 행복은 예측 가능한 행복이 된다.
예측 가능한 행복 위에 그 날 분량의 행복을 얹는다. 기대감이 될 수도 있다.
그렇게 계속 쌓이다 보면 행복은 단단하게 형태를 갖추고 물질화된다.
뇌 속에서 행복이라는 회로가 만들어지면 행복한 일이 없어도 그 회로는 저 스스로 따뜻함을 방출한다.
나는 몰랐다.
새로움만이 자극이고 이미 익숙해진 것은 더 이상 나를 움직이지 못한다고 믿었다.
그 믿음은 내가 머물지 못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나온 결론이다.
도파민은 기대와 추구하는 것이 있을 때 분출되는 물질이다.
한계와 포기 속에서는 무엇을 해도 분출될 수가 없다.
대신 은은하게 스트레스 호르몬이 분비될 것이다.
나는 늘 자극을 찾았고 반복되는 평온함은 건너뛰었다.
더 강한 자극이 있어야 했다.
직장상사 길들이기를 4일쯤 생각하다가 행복에 대한 나의 고정관념이 무너졌다.
직장 상사 길들이기는 여주가 무인도에서 탈출한 성공 신화가 아니라 해석의 혁명이었다.
절망에 빠져있는 사람들에게 묻는다. 거기가 끝이라고 생각하느냐고,
사회 탓, 구조 탓, 부모 탓, 남 탓을 하며 벗어날 수 없다고 믿고 있지 않느냐고.
수렁은 존재한다.
아니 삶은 수렁 그 자체이다.
빠져 죽거나 헤쳐 나가거나.
수렁에 머물러 편안하게 존재할 수는 없다.
국가가 사회가 부모가 한 번쯤 발판을 만들어 줄 수는 있다.
하지만 다음 수렁에서 디딜 발판은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그 생각하다가 문득 내가 사는 무인도가 보였다.
나의 비행기는 폭발해 흔적도 없다.
강하고 부드럽던 근육은 사라지고 오래된 타이어 같이 딱딱하고
갈라진 근육만 남았다.
나의 무인도는 늙음이고 무기력이고 노화이다.
나는 그것을 자연의 순리라고 부르며 체념하고 있었다.
운동을 해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늙으면 체력은 떨어지고 근육은 소실되고 눈도 귀도 어두워지는 것이라고
무인도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벗어나지 못한다는 생각에 빠진 채 살았다.
어떤 디딤돌을 딛고 건너갈지는 나에게 달려있다.
그 생각을 하는 순간 뒤통수를 해머로 치는 듯한 자각이 왔다.
지금 글 쓰고 있을 때가 아니야!
디딤돌을 만들러 나가야 돼! 무릎이 사라지고 있어!
나는 집을 뛰쳐나왔다.
어제와 똑같이 테니스를 연습하러 나왔지만 오늘부터는 테니스 기술 연마가 아니라
무릎 디딤돌 만들기 시간이다.
왜 사람은 알면서도 행동하지 않는가?
나는 답을 얻었다.
행동은 해석이 바뀔 때 나온다.
집에서 혼자 스쾃를 천 개는 도저히 할 수 없다. 그러나 공을 치면서는 천 개의 스쾃쯤은
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오늘 근데 또 이렇게 하다가 무릎 절단 나는 거 아닌가 몰라.
진정하자.
무릎 절단 나지 않게 무릎과 협상을 하자.
콘크리트 부어 만드는 디딤돌이 아니다.
날마다 작은 돌을 줏어다가 포개서 만들어야 한다.
언제 든든한 디딤돌이 만들어지는지 모른다.
그래도 해야 한다.
디딤돌을 만드는 행동 그것이 노화라는 수렁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이다.
행동은 해석이 바뀔 때 나온다.
직장상사 길들이기는 해석이 여러 번 바뀌었다.
더 바뀔 수 있을 여지가 있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