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키던 영화가 이제 녹여먹는 영화로
터미네이터가 나온 지 벌써 45년이 지났다.
그런데도 엊그제 본 영화 같다.
나는 일생을 달리듯 영화를 보았다.
영화는 늘 내 삶의 옆에서 흘러갔다.
극장에 들어가 앉아 있었지만
영화를 천천히 졸여 볼 시간은 없었다.
그저 삼키듯, 넘기듯, 소비하듯 보았다.
그때의 나는 영화가 필요했다.
젊은 날의 영화는 사탕이었다.
바쁘고 팍팍한 삶 속에서 잠시 입에 넣고 굴리는 달콤함.
그 단맛 덕분에 또 하루를 버틸 수 있었다.
어떤 날의 영화는 게보린이었다.
현실의 통증을 잠시 무디게 해주는 진통제.
극장 안의 어둠 속에서
나는 잠시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몸을 숨겼다.
달콤함도 필요했고 마취도 필요했다.
이제 나는 국가 공인 노인 자격증을 받았다.
버스는 무료이고 영화관 비용은 반값이다.
달리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생겼다.
그제야 영화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설탕 없이도 살 수 있고 진통제 없이도 버틸 수 있다.
영화를 보고 나면 곧바로 일상으로 달려가지 않아도 된다.
최고의 영화를 고를 필요도 없다. 아무 영화라도 좋다.
입 안에 사탕을 오래 물고 있듯 영화를 혀 위에서 천천히 굴려본다.
그러다 보면 영화가 스스로 옷을 벗는다.
그 옷은 영화의 것이 아니다. 내 머릿속에 켜켜이 쌓여 있던 인식의 옷이다.
내가 당연하다고 믿어온 생각, 내 것이라 착각했던 관점, 습관처럼 반복하던 판단이
조금씩 드러난다.
영화는 재미와 이야기를 전한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어느 순간 내 사고의 구조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인간은 사탕만 빨아 먹는 존재가 아니다.
달콤함만 반복되면 사유라는 이빨이 녹아버린다.
누군가가 먹여주는 생각을 들고 그것이 곧 내 생각이라고 믿으며 살게 된다.
자신이 생각할 능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한 채.
영화를 본다는 것은 재미나 시간을 보내기 위한 일이 아니라
내 사유의 위치를 확인하는 일이다.
나는 지금 어디에서 생각하고 있는가.
무엇을 보고 있는가.
달리지 않아도 되는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멈출 수 있게 되었다.
영화가 깊어진 것이 아니다.
내가 달릴 수 없어져 멈출 수 있게 된 것이다.
멈춰 있자 영화는 서라운드로 돌아간다.
내가 보지 못했던 뒤편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