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 원

설득력 없는 제목

by 정오의 햇빛

어느 날 아들의 눈에 허공에 걸린 숫자가 보인다.

엄마가 해주는 음식을 먹을 때마다 엄마 머리 위 숫자가 하나씩 줄어든다.

0이 되면 엄마가 죽는다고 죽은 아버지가 꿈에 찾아와 알려준다.


아들은 두려워한다.

엄마와 거리를 두기 위해 서울로 진학한다.

엄마를 살리기 위해 멀어지는 선택을 한다.

사랑은 가까이 있는 걸까. 멀어지는 걸까.

엄마는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했다.

이유도 모른 채 아들에게 외면당한다.

가족이 없는 여자친구는 가족을 원한다.


엄마는 췌장에 문제가 있다. 아들은 위암에 걸린다.

수술 장면이 나오고 눈물이 흘러야 할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울지 않았다.

왜 아무 감동도 없었을까.


명절에는 명절에 맞는 영화를 봐야 하는 걸까.

크리스마스에는 〈나 홀로 집에〉가 반복되고 설날에는 가족의 소중함을 말하는 영화가 개봉된다.


나는 그 장르에 지친 건 아닐까.

하룻밤이 지나고 침묵하던 영화가 다시 말을 건다.


엄마 역할을 오래 시키는 일은
엄마라는 역할에 갇혀 인간으로서의 삶을 줄이는 일과 비슷한 건 아닐까.

자식이 성인이 된 뒤에도 계속 엄마의 헌신을 요구하는 건 누군가의 시간을 갉아먹는 일은 아닐까.

엄마는 언제까지 엄마여야 할까.

엄마는 언제 한 사람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엄마 이전에 사람이었듯이 엄마 이후에도 사람이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왜 자식에게 애틋함이 부족한 걸까.

다른 집에서 보이는 장면이 왜 우리 집에는 없는 것처럼 느껴질까.

그 아쉬움이 영화를 건조하게 만든 건 아닐까.


가족은 출생으로 시작된다.

그 관계는 죽음으로만 끝나는 걸까. 죽음으로도 끝나지 않겠지. 제사가 있다.

성인이 된 자식은 타인으로 존중받아야 하는 건 아닐까.

양육이 끝난 부모는 무한한 에너지 공급처가 아니라 한 사람의 어른으로 남아야 하지 않을까.


영화는 연출된 장면이다.

보통의 집이 어떤지 사실 나는 모른다.

영화가 보여주는 장면을 현실이라고 믿고 있는 건 아닐까.

현실이 다를 때 영화를 더 현실처럼 붙들고 있는 건 아닐까.


〈넘버원〉은
나를 울리지 않았다.

그 대신 의존과 독립에 대해 묻게 했다.

사랑은 자발적일 때 빛나는 걸까. 당연해지는 순간 갈고리가 되는 건 아닐까.

나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당연함을 요구하고 있지는 않을까.

아니면 당연함을 견디지 못하고 있는 걸까.


영화가 멀어졌는가.

아니면 내가 그 장면에서 멀어져 있었던 걸까.

멀어지고 싶은걸지도 모르겠다.


지긋지긋한 양육에서 벗어났다.

자식은 올가미에서 벗어난 것이려나?


독거노인은 가족이 그립지만 지겹다. 타인이 건네는 떡국한그릇에 감동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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