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자와 피전도자의 시간2

빛보다 빠른 호출

by 정오의 햇빛

“다 말장난이지.”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머릿속에서는 자동으로 번역이 일어났다.

— 쓸데없는 소리.

지금의 말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 내가 무언가를 말하려 할 때마다 화를 내며 내 입을 틀어막던
그 남자의 말이었다.

집주인 남자는 눈앞에 있었지만 내 몸이 반응한 대상은 이미 사라진 그 사람이었다.


그 순간 집주인은 흐려지고 “똥기계”라 부르던 그 남자가 또렷하게 떠올랐다.

나는 55년 동안 그에게 한 번도 말대꾸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번에는 처음으로 입이 열렸다.

“그런 소리 하면 난 이 자리에 같이 할 수 없습니다.”

말은 현재를 향해 나갔지만
어딘가에서는 오래 미뤄 둔 대답처럼 느껴졌다.

전이의 순간이었다.


초대한 집주인이 가볍게 던진 한마디가
내 안의 오래된 장면을 건드렸다.

과거를 닮은 말은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작동한다.
빛보다 빠르게 55년 전의 나를 지금 여기로 호출해 낸다.


몸은 현재에 있는데 신경계는 과거의 좌표로 이동하는 순간.

그때 나는 묻게 된다.

지금 내가 반응한 것은 정말 이 사람일까.


아니면 아직 끝나지 않은 아주 오래된 장면일까.

현재의 일에 반응하는 것이 참 의미없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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