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소녀 그리고 바다

성장영화일수도. 나는 심리치유영화로 보았다.

by 정오의 햇빛

상영시간이 두 시간 반쯤 되었나. 솔직히 말하면 거의 내내 지루했다.

느리고, 건조하고, 연출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냥 일본 사람들의 생활을 멀찍이서 바라보는 느낌.


중간에 여러 번 자세를 고쳐 앉았다. 너무 졸려서 양배추를 씹으며 버텼다.
끝까지 보려고, 그냥 묵묵히.


그런데 마지막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숲속에서 소년과 소녀가 서로의 몸을 받아들이는 장면.
그 장면 하나가, 앞의 두 시간 반을 전부 다시 쓰기 시작했다.


소녀는 소년을 좋아해서 다가갔다. 하지만 소년은 밀어냈다.

어느 날 소녀가 다시 다가가자 소년은 화를 내며 집으로 들어가 엄마에게 쏟아내지 못했던 말을 터뜨린다.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냐고. 남자를 그렇게 갈아치우냐고. 음란하다고.

엄마는 대꾸하지 못한다.


나는 그 장면에서 소년이 소녀를 밀어낸 이유가 단순히 준비가 안 돼서가 아니라는 걸 느꼈다.

그의 몸 어딘가가 이미 오래 전에 굳어 있었던 것 아닐까.


태풍이 온다. 엄마와 연락이 끊긴다. 소년은 무너지듯 엄마를 걱정한다.

그리고 결국 엄마를 다시 만난다.


그 뒤에야 소년과 소녀는 서로에게 간다.
그리고 소년은, 끈적거려서 그렇게 싫어하던 바다 속으로 소녀와 함께 들어간다.

인어들처럼 자유롭게 알몸으로 푸른 바다속을 유영한다.


나는 그 흐름이 이렇게 느껴졌다.

엄마와의 막힌 관계가 아주 조금 열리고 나서야 소년의 몸도 비로소 세계 쪽으로 열린 것 같았다.


영화를 보며 이상하게도 내 이야기가 따라 올라왔다.

나는 오랫동안 남자에게는 역겨움을, 여자에게는 어딘가 모를 경멸을 느껴 왔다.

그게 내 성격 문제라고 생각했다.
내가 까다롭고, 예민하고, 어딘가 결함이 있어서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다르게 보였다.


혹시 나는 오래 묵은 원한을 말로 꺼내지 못해서 그 자리에 굳어 있었던 건 아닐까.

남자에게 역겨움을 느낀 ‘처음’을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어쩌면 너무 어릴 때였을 것이다.

그 남자는 원래부터 내 삶 안에 있었으니까.


나보다 열네 살 많은 의붓 오빠에게 말할 수 없었다. 무서워서일게다.

그래도 만약 그때의 내가 말을 할 수 있었다면 아마 이런 문장이었을 것 같다.

너는 참 나쁜 사람이다. 네가 그렇게 잘났냐. 니까짓 게.

그리고 더 단순하게는, 이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너는 가정 파괴범이야. 네 사정이 있었던 건 알겠다.
그렇다고 내게 일어난 일의 책임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

그냥 나는 네가 싫다. 꺼져라.


이 영화를 보며 이상한 기쁨이 올라왔다.

영화는 너무 재미없었는데, 그 마지막 한 장면이 이상하게도 나를 기쁘게 했다.

왜 그런지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재미없는 영화는 나를 점점 해체한다.

생각을 느슨하게 만들고, 판단을 늦추고, 나를 약간의 최면 상태 비슷한 곳으로 데려간다.

그러다가 어느 한 장면이 번쩍 들어오면, 그 장면은 아직 말해보지 못한 어느 곳

접촉되지 못한 무의식 어딘가에 곧장 꽂힌다.

그리고 건드려지지 못하고 소외된채 어둠속에 갇혀있던 감정이 툭하고 터져나온다.


오늘 끝까지 버티며 지루한 영화를 볼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다.

언니와 오빠에게 하지 못한 말과 풀리지 않는 원한때문에 세상과 담쌓고 살았다.

이제 조그만 쪽문 하나 열리는 걸까?


지루하고 뭔지 알 수 없는 영화를 보다가 오래 묵은 종기가 터졌다.

이제 새 살이 나오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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