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은 감동으로만 남고

나는 드러내지 않는 글.

by 정오의 햇빛

어떤 예술 작품에 대한 인터뷰를 듣는다.
사람들은 작품을 말한다.

춤선이 어떻고, 스케일이 크고, 역동적이었고, 감동을 받았다고 말한다.

듣고 있노라면 작품에 대한 정보는 넘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말을 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그 작품을 접한 뒤 그 사람이 어떤 상태로 이동했는지, 어떤 균열이 생겼는지,
무엇이 흔들렸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나는 그 감상을 들으며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


감상문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감상은 나의 경험을 쓰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작품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말해야 하지 않는가.

“감동적이었다.” “눈물이 났다.” 그 다음은 없다.


어디가 어떻게 아팠는지, 무엇이 떠올랐는지, 그 경험이 나를 어디로 데려갔는지는 말해지지 않는다.

그건 감상이 아니라 작품 소개에 가깝다.


나는 글로 상대와 접촉하고 싶다.

글은 안전망이라고 생각했다.
말보다 천천히 고를 수 있고, 감정을 붙들어 둘 수 있고, 조금은 덜 흔들리면서 건넬 수 있으니까.

그런데 글로조차 접촉이 되지 않는다면 실체와의 접촉은 어떻게 가능한가.


글이라는 중간 매개도 통과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디서 만날 수 있는가.

어쩌면 문제는 이것인지도 모른다.

자기 자신의 감정이나 상태를 말로 붙들어 꺼낼 수 없는 상태.


그건 마치 아직 말을 배우지 못한 어린아이와 같다.

그 안에는 이미 세계가 다 들어 있다.
기쁨도, 두려움도, 당혹도, 슬픔도.


그러나 그것을 꺼내어 상대에게 건넬 수가 없다.

그때 가능한 것은 울음뿐이다. 몸부림뿐이다.

울음은 비어 있어서가 아니라 넘치기 때문에 터진다.


하지만 울음은 공유가 되지 않는다.
그건 “느껴줘”에 가깝지 “같이 보자”는 아니다.

자기 자신과 만나보지 못한 사람이 타인과 접촉할 수 있을까.

자기 안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 채 무엇을 건넬 수 있을까.


나는 자꾸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 자기와 접촉하지 못한 사람은 타인과도 접촉할 수 없다.

그건 애초에 불가능한 시도다.

그런데 이 생각을 끝까지 밀어붙이면 나는 또 다른 질문 앞에 선다.

자기와의 접촉은 완성된 상태여야만 가능한가.

우리는 완전히 자기 자신을 이해한 뒤에야 누군가를 만날 수 있는가.

어쩌면 접촉은 완전함이 아니라 번역의 과정인지도 모른다.

감각은 있지만 언어가 없는 상태.

그 상태를 조금씩 말로 옮겨오는 과정.

누군가가 그 울음을 버리지 않고 “지금 뭐가 있었니?”라고 묻는 순간
그 아이는 처음으로 말을 배우기 시작한다.


타인을 통해 자기와 만나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

나는 울음만 오가는 관계가 싫다.

나는 언어로 만나고 싶다. 내 상태를 꺼내어 보여주고, 상대의 상태를 함께 들여다보고 싶다.


감상은 작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나를 어떻게 흔들었는지를 말하는 일이라고
나는 믿고 싶다.

나는 작품을 빌려 나를 말하고 싶다.


그리고 나를 건네고 싶다.

접촉은 완전하지 않아도 좋다.
하지만 적어도 나의 감동은 말해지고 싶다.


영화글에는 영화이야기만 있고 미장센만 이야기 하고 감독의 세계관만 있다.

사람들은 정보가 필요한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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