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너지만 4

공만 치는게 아니고. 눈빛도 치고 말도 치고...

by 정오의 햇빛

06시에 만났다.

매번 늦던 공주가 오늘은 정시에 나타났다.


오늘은 끝나는 시간을 내가 제안했다.
공주의 요구도 내가 조금 편안한 쪽으로 바꿨다.
아주 작은 변화였지만, 몸은 그 차이를 또렷하게 알고 있었다.


공주는 확실히 사람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많은 편은 아니다.
휠체어를 들어 좁은 차 트렁크에 넣어야 하는 상황에서 그는 바퀴를 빼지 않고 넣을 수 있냐고 내게 물었다.

예전 같으면 그냥 들어서 넣었을 것이다.
몸이 무리하는 줄 알면서도, 그 순간의 흐름을 깨고 싶지 않아서.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이렇게 들면 다칠 수 있어서 바퀴를 빼서 나눠 넣을게요.”

처음으로 내 몸의 기준을 먼저 말했다.

나도 장애인과 별로 다르지 않은 몸이다. 겉보기만 멀쩡할뿐.


돌아보니 나는 늘 상대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상대가 나를 배려해 주기를, 상대가 먼저 알아주기를.

그리고 그 처분이 내 마음에 부족하면 속으로 이렇게 결론 내렸다.

나를 무시했구나.


하지만 오늘에서야 조금 보인다.

상대가 나를 존중하지 않아서라기보다 어쩌면 내가 나를 존중하는 법을 몰랐던 건 아닐까.

나는 내 한계를 말하지 않았고 내 기준을 설명하지 않았고 그저 조용히 감당해 버렸다.

그러면서 마음속에서는 보글보글 무언가가 계속 끓고 있었다.


불쾌감이나 서운함이 표현되지 못하면 그건 사라지지 않는다.

겉으로는 아무 일 없는 얼굴로 같이 테니스를 치고, 같이 움직이고, 같이 시간을 보내지만,

몸 어딘가에서는 계속 긴장이 유지된다.


나는 그 긴장을 상대의 태도 때문이라고만 생각해 왔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내가 먼저 말하고, 내 기준으로 방법을 조정하고 나니 테니스 코트의 공기가 이상할 만큼 포근했다.


공주가 변했을 리는 없다.
나도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분명 무언가는 달라져 있었다.


나는 그동안 도움을 줄 때 상대가 원하는 방식에 최대한 맞추는 것이 좋은 태도라고 믿어 왔다.

하지만 오늘 처음으로 다른 감각이 생겼다.

도움은 무조건 상대 방식대로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조정된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것.

그게 오히려 몸을 지키고 마음도 덜 지치고 관계를 오래 가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겠다.


나는 오늘
거절하지도 않았고 (거절할 수도 없다. )
억지로 참고 수행하지도 않았다.

그 사이 어딘가에서 처음으로 균형을 잡아본 느낌이다.


테니스를 치면서 인간관계를 처음으로 연습하는 기분이 든다.

언제 속도를 늦춰야 하는지, 어디까지 도와줄 수 있는지, 내 몸이 어디서 긴장하는지.

이런 것들을 이제야 하나씩 배우고 있다.


어쩌면 내 삶에서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말해보지 못했다는 데 있었는지도 모른다.

말로도,
글로도,
기도로도
내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을 밖으로 흐르게 하지 못한 채 살아온 시간.

나는 살아 움직이는 감정들을 내 안에 오래 가둔 채 살아온 건 아닐까.


오늘은
아주 조금, 그 문을 열어본 날이다.


영화 소녀 소년 그리고 바다에서 관계가 시작되는 순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보지 못해서 배우지 못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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