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원 짜리 영화의 힘.
보고 싶은 영화는 아니었다. 혼자 사는데 무서운 영화보면 부작용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영화값이 계속 떨어지더니 당근에서 이천 원에 팔리고 있었다.
아무리 재미없는 영화라도 이천 원이면 한 번 봐줘야 하지 않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영화관에는 젊은 관객들이 많았고 상영 내내 비명도 없이 극장은 조용했다.
영화는 ‘무서움’ 자체를 전시하듯 보여주는 방식이었다.
무서움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적나라하게 펼쳐 보이는 영화.
그런데 이상하게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
영화가 끝나자 웃음이 터졌다.
기대와 너무 다른 결과를 본 어이없는 웃음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뭐 저딴 영화가 다 있어, 속았다는 생각이 먼저 올라왔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아, 감독은 무서움을 저렇게 표현하고 싶었구나.
영화에는 반드시 이래야 한다는 고정된 방식이 있는 것은 아니니까.
영화가 틀린 건 아니었다.
나는 그 순간 내 판단이 조금 너그러워졌다는 것을 보았다.
판단하지 않고 바라보는 시선이 내 안에 생겨나고 있었다.
옆자리 남자에게 물었다. “얼마 주고 들어오셨어요?”
그는 만 이천 원을 냈다고 했다.
영화값이 아깝지 않냐고 묻자 그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는 듯 말했다.
나는 생각했다.
아마 내가 만 이천 원을 냈다면 속았다고 느꼈을 것이다.
내가 낸 가격에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낸 돈은 이천 원이었다.
가격이 감정을 바꿨다.
이천 원짜리 영화라면 뭐가 나와도 괜찮다는 마음.
그래서 나는 영화 내내 졸다 깨다를 반복하며 화면을 흘려보았다.
졸다 깨서 보이는 화면은 무서웠다.
음악, 조명, 피, 보이지 않는 발자국 소리까지 모든 요소가 공포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도 내 안의 무서움은 건드려지지 않았다.
맥락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결국 무서움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자극이 내부의 어떤 것을 건드릴 때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
맥락 없는 공포 장면들의 나열은 결국 무서울 수가 없었다.
느낌은 항상 내 머릿속에서 완성된다.
요즘은 유튜브의 시대다.
채널 몇 개뿐이던 시대에서 수십, 수백 개의 선택지로 오래전에 이동했다.
그리고 지금은 숏폼의 시대다. 1분에 16부작 드라마 한개가 펼쳐진다.
맥락이 없어도 괜찮다. 감동이 없어도 괜찮다.
보는 순간 눈을 붙잡는 자극만 있으면 된다.
짧을수록 좋다.
두 시간 동안 한 화면 앞에 앉아 있을 여유도, 인내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어쩌면 이것뿐인지도 모른다.
순간의 무료함을 밀어내 줄 자극
떠오르는 잡생각을 덮어 줄 자극
지금 이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게 해 줄 자극
그래서 긴 서사는 점점 필요 없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저 눈앞에서 반짝이기만 하면 된다.
시력이 약해진 사람도 강한 빛에는 반응하듯이.
이천 원짜리 영화 한 편이 내 안의 생각들을 이렇게 끌어올렸다.
이 영화가 아니었다면 떠올리지 못했을 생각들.
물론 이것이 거창한 영화 철학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분명하다.
나는 이 영화를 통해 내가 언제부터 영화에 대한 나만의 기준을 조금 내려놓기 시작했는지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재미와 별개로 기억에 남는다.
공짜같은 공짜 아닌 영화 귀신 부르는 앱 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