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된 삶
글쓰기를 통해 무엇을 원하는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나는 하루 동안 내가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지, 어떤 생각들을 하는지 알고 싶다.
삶은 정말 물 흐르듯 흘러간다.
그 흐름 속에 있으면 우리는 기능으로만 존재한다.
움직이고, 반응하고, 버티고, 처리한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가면 내가 오늘을 어떻게 살았는지, 무엇이 나를 흔들었는지,
어디에 에너지를 썼는지 남아 있지 않다.
주체가 아니라 배경이 되어버린다.
이제 안다.
나는 내가 어떻게 하루를 통과하는지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그동안의 날들은 상황을 넘기기에 급했고 감정을 해석할 여유가 없었다.
선택하기보다 주어지는 것을 받아 삼키는 시간이 많았다.
삶은 쉬지 않고 굴러가는데 나는 어디에 있는지 모른 채 수레바퀴만 돌리고 있었다.
돌아보니 삶은 나 없이도 굴러갔고 돈은 통장에 쌓였고 가족은 각자의 삶으로 흩어졌다.
그때 나는 어디에 있었을까.
그래서 지금 손가락에라도 걸리는 나를 건져 올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
하다못해 오늘 무엇을 먹었는지 어디를 갔는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라도 걸어두고 싶다.
이제 나는 나 없는 삶을 더는 살 수가 없다.
붙잡을 것도 도망칠 곳도 나를 증언해 줄 사람도 없다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증인이 되기 위해 나를 바라본다.
존재의 알리바이를 위해.
없었던 것처럼 지나가 버린 시간들을 있었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나는 의미를 만들고 싶은 것이 아니다.
사라지지 않기 위해 나를 바라본다.
글을 통해 관계를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관계가 없을 때 나를 버리지 않기 위해 나에게 말을 건네는 중이다.
생각해 보면
유배지에서 글을 쓰던 사람들, 평생 일기를 쓰던 사람들, 혼자 철학서를 써 내려가던 사람들 역시
자기 삶을 언어로 존재하게 하기 위해 펜을 들었을지 모른다.
글은 예술이나 업적 이전에 한 인간이 외부 없이도 자기 존재를 붙들 수 있게 하는
버팀목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글쓰기는 재능 있는 사람의 전유물이 아니라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있는 욕망의 표현이다.
어린이에게 일기를 쓰게 하는 이유도 글을 잘 쓰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대신 만들어 줄 수 없는
‘너’라는 사람을 자기 손으로 빚어 보라는 연습일 것이다.
삶의 문법을 배우지 못하면 하루는 쉽게 녹아 사라진다.
어제 나는 너무 졸려 사유를 적지 못했다.
잠을 깨기 위해 남의 브런치를 읽다가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자기 삶을 붙잡으려 애쓰고 있다는 것을 조용히 목격했다.
그리고 오늘, 나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나는 사라지지 않기 위해 쓴다.
아유슈비츠도 아니고 731도 아니고 케스트 어웨이의 톰 행크스도 아닌데 왜 이렇게 처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