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것도 남지 않은

핑계마저 사라진.

by 정오의 햇빛

어머나, 벌써 집에 갈 시간이 지났네.

이렇게 열심히 글놀이에 빠져 있었다니.


집에 혼자 있으면 몸이 먼저 생활을 향해 움직인다.

청소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식사를 준비하고, 내일 할 일을 챙긴다.

이것저것 하다 보면 글을 쓸 시간을 따로 떼어내기가 쉽지 않다.


나에게 집은 오래도록 쉬는 공간이었고, 생활 유지를 위한 노동의 공간이었다.

글쓰기의 자리는 아니었다.


언젠가는 집도 글쓰기 공간이 되겠지.

밖으로 나갈 근력도, 마음도 내키지 않는 날이 오면

나는 결국 집 안에서 문장을 붙들고 있을 것이다.


오늘 아침도 그랬다.

이것저것 하다 보니 운동을 11시에야 나갔다.

아, 우거지를 삶고 청소를 하느라 늦어졌구나.


샤워도 해야했고 식사도 바빴다.

테니스 연습을 하다가 스쳐 지나가는 여자와 꺼끄러운 말을 나누고,

집에 와서는 잠깐 졸다가 김밥 알바를 하러 다시 나갔다.


알바가 끝난 뒤

나는 5시 20분부터 지금까지

브런치에 앉아 있다.


할 일이 없으니 글을 쓰는 걸까.

글을 쓰고 싶다고 말해왔지만 늘 작은 핑계들이 나를 앞질러 갔다.

이제는 그 핑계들이 사라진 순간이 온 것뿐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글쓰기는 내가 믿어온 것만큼 절박한 일이 아니었던 걸까.

아주 작은 이유만 있어도 쉽게 뒤로 밀려나는 일이었으니까.

내 삶에서 실용적이고 생산적인 일들이 비워진 지금에서야 글쓰기가 조용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아무도 부르지 않는 시간에 글쓰기만이 나를 불러 세우고 나를 의자에 앉혀 둔다.


생각해 본다.

언젠가 글쓰기도 할 수 없는 날이 오면 나는 보는 것만으로 살아가겠지.

보는 것이 어려워지면 듣는 것만으로 살아갈 것이고,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생각마저 희미해지는 날이 온다면 그때는 숨 쉬고 삼키는 일로 하루를 건너가겠지.


그래도 그 삶은, 그 이전의 모든 삶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존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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