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과 몸 사이에서

by 정오의 햇빛

깨달음에 대한 갈망은 아마 대부분의 인간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존재의 가장 완전한 상태 같은 것을 어렴풋이 감지한다.

존재라는 말 역시 분명하게 붙잡히지 않지만, 가장 인간다운 인간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다면 마땅히 모든 인간은 그 상태에 가까워져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깨달음은 여전히 미지의 영역에 머물러 있고, 각자의 깨달음은 마치 각자만의 고유한 존재 방식처럼 흩어져 있다. 그래서 그것은 늘 나와는 먼 일처럼 느껴진다.


어제 「존재 탐사도」라는 글을 완성하면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이 정리가 글로만 남는다면, 그것은 누구를 위한 정리인가.

이렇게 또렷하게 써놓고도 내 몸과 삶의 방식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못한다면, 나는 단지 ‘알고 있는 나’를 확인한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것은 어딘가 어긋난 일이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글을 쓰는 마음은 충분히 인간적이다.
하지만 내가 아직 먹어보지도 않은 음식을 두고 “이거 정말 좋다더라, 당신도 먹어보라”고 말하는 일은

어딘가 우스꽝스럽다.


운동도 그렇다.
낙상을 예방하려면 민첩성, 유산소, 근력 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모를 수가 없다.

그런데 현실의 몸은 그 지식을 따라가지 않는다.


노인들의 걸음걸이는 비틀거리고, 자세는 무너져 있다.
늙으면 원래 그런 것이라고, 이상하게 체념한 이해 속에서 몸은 서서히 무너진다.

나 역시 다르지 않다. 침대 위에서 몸을 뒤척이며 느낀다.

허벅지의 연결감이 약해지고, 무릎에 충격이 전해지고, 허리는 분명 신호를 보내고 있다.


곧 영향을 줄 것이라는 것도 안다.

그런데도 나는 운동을 하지 않는다.

아직 직접적인 불편이 아니기 때문일까.
아니면 어차피 망가질 것이라는 체념 때문일까.


얼마 전 브런치에서 ‘자신을 제품처럼 관리한다’는 문장을 보고 묘한 충격을 받았다.

비인간적인 듯하면서도 지나치게 인간적인 말이었다.


호떡 하나를 구울 때도 터지지 않게 굽는다.
만두가 터지면 봉합해서라도 온전한 상품으로 만든다.

우리는 터진 음식은 집어 들기 싫어한다.


그런데 자신의 몸이 무너지는 일에는 놀랍도록 관대하다.

이 모순 속에 내가 있다.


스무 살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은 완전히 다르다.

스무 살까지의 나는 하나의 생각에 붙들려 살았다.
그 생각은 나를 웃지도 울지도 못하게 했고, 집중도 움직임도 허락하지 않았다. 마음속은 늘 엉겨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나는 희미한 가족도를 혼자서 선명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 같다. 이해할 수 없는 관계의 퍼즐을 맞추느라 너무 오래 붙잡혀 있었던 것이다.


그 가족도가 어느 순간 굵게 완성되었을 때, 나는 그 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 나는 곧바로 행동하지는 못했다.

왜였을까.

아마 내 안 어딘가에 이런 문장이 있었던 것 같다.


“알지만, 나더러 어쩌라고.”

그들은 내가 사라지기를 원했지만, 사라질 수 있는 조건은 주지 않았다. 비용을 지불하지 않은 요구였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움직이지 못했던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알지만 움직이지 않는 상태.
그 감각이 지금의 나에게도 어딘가 남아 있다.


나는 공감 능력이 없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 많이 공감하는 사람에 가깝다.

그래서 대화할 때는 일부러 감정을 거둬내고 데이터만 남긴다. 타인의 감정까지 짊어지고 서 있기에는 내 몸이 너무 힘들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며칠 전, A와 B와 함께 영화를 본 자리에서 작은 사건이 있었다.
나는 B를 위로하려는 마음으로 한 말을 했지만, 그 말은 왜곡되어 돌아왔다.

불쾌함은 있었지만, 나는 대응하지 않기로 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가 말을 하는 순간, 나는 그들의 역동 속으로 완전히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재료로 남기로 했다.

재료는 말이 없다.

그때 막 「존재 탐사도」를 쓴 직후였기 때문에, 나는 스스로에게 명령하고 있었다.


존재하라.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그 일을 떠올리면 마음 한편이 불편하다.

해명하고 싶은 마음도 여전히 남아 있다.

존재는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지금 내 허리는 분명 신호를 보내고 있다.
이대로 가면 곧 무너질 것 같다는 느낌이 또렷하다.

그런데도 나는 운동을 하지 않는다.

어쩌면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잘 관리해서 3년 후에 망가지든
대충 살아서 1년 후에 망가지든
망가지는 건 마찬가지 아닌가.

이 생각은 위험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체념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깊이 생각하기를 피하고 있다.
이 질문을 붙잡고 있으면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올라온다.

하지만 알고 있다.


여기서 도망가면,
몸도 생각도 삶도 조금씩 같은 방식으로 무너질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 지금 필요한 것은 아마 거창한 깨달음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주 작고 구체적인 행동 하나.

오늘 허리 주변 근육을 5분이라도 깨우는 일.
내가 쓴 문장이 내 몸에서 단 1mm라도 현실이 되게 만드는 일.

어쩌면 존재는 거대한 통찰의 순간이 아니라 이 미세한 실행의 반복 속에서 조용히 만들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얼마전에 썼던 존재탐사도를 오늘 읽어보니 왜 썼는지도 모르겠다.
무슨 깨달음이 와서 열심히 쓴 걸까?
내가 써놓고도 그 메시지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남이 보면 그 글에서 무슨 유익을 얻을 수 있을까?
그냥 길고긴 이야기가 되버린거 같다.

의식은 안되지만 어딘가에서 무엇인가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중이라고 믿어버리자.

다른 수도 없다.


써 놓은 글은 마치 지나간 강물같다.

고여 있는 호수가 되어야 하는 건가?

펌푸로 물을 열심히 뽑아 낸 다음 마구 흘려보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래도

훌라후프를 돌렸고 찬물로 샤워를 했고 드라마틱하게 느낄 수는 없지만 미세한 변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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