쉘브르의 우산을 보는 듯.
영화는 동화 같았다. 아니, 만화영화 같았다.
프랑스의 작은 항구 도시 로슈포르. 쌍둥이 자매가 사는 곳. 도시는 거의 만화영화처럼 색감이 좋았고, 그 속 사람들은 음악가, 화가, 선원, 서커스 단원들처럼 특별했다. 서로를 모르지만, 서로를 향해 가는 사람들.
결정적인 순간, 5분 빠르거나 5분 늦어 계속 엇갈리는 관계들. 영화 속 도시의 풍경은 그림 그대로였고, 그들이 주고받는 말과 노래는 재즈였고 뮤지컬이었다. 우리는 늘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인연은 이미 바로 옆에서 스쳐 지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식사하던 자리 옆의 여자도, 그 순간 어떤 인연이었을지 모른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타이밍이 맞지 않고 시선이 어긋나면 만날 수 없다. 영화 속 작은 행동들이 이어지고, 사소한 우연이 결국 만남을 결정한다.
남자들의 연극적인 친절, 여자들의 드라마틱한 사랑스러움. 인간적이라기보다, 마치 살아 움직이는 캐릭터 같다.
현실은 다르다.
매주 가는 남문서점 영화관에서 마주치는 젊은 남자의 표정을 보면, 참을 수 없을 만큼 못마땅하다.
온몸과 눈빛으로 “나는 내 삶이 만족스럽지 않아요”를 보여준다. 친절은 찾아볼 수 없고, 다른 사람들의 과장된 친절은 오히려 가식처럼 느껴진다.
그 젊은이는 아마 사교적이지 않을 것이다. 무례하고 무심하며 무성의하다. 그런데도 나는 그를 보며, 마치 과거의 내 모습을 보는 듯하다. 그래서 더 싫은 것일 게다. 누가 자신의 치부를 보란 듯이 내놓으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볼 수 있겠는가.
영화 속 캐릭터들은 완벽하게 자신에게 충실하다. 하지만 현실 속 인간이 자기 감정에 충실한 순간, 예의와 충돌한다. 그 젊은이처럼, 200% 자신에게 충실한 사람이 꼭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영화 속 인물들은 살아서 움직이고, 각자의 캐릭터에 충실하다. 설령 만들어진 캐릭터라도 생생하다. 현실 사람들은 카메라 없이 날것 그대로 자기 감정에 충실하다. 그 충실함이 때로 불편하고, 어쩌면 나 자신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영화와 현실, 동화와 삶, 우연과 필연, 그 경계에서 나는 내 안의 과거와 마주한다.
사람을 만나는 일은 결국 타이밍과 마음, 조금의 우연이 만들어내는 일상이다. 굳이 ‘기적’이라는 큰 단어를 꺼낼 필요 없다. 일상을 기적이라 부르든, 기적을 일상이라 부르든, 결국 같은 일이다.
나는 혼자 탁자에 앉아 글을 쓴다. 아무도 말을 걸지 않는다. 방해하지 않는다.
좋기도 하지만, 외롭기도 하다. 때때로 방해받고 싶다.
언젠가 어느 여배우가 “나도 때로는 포르노 배우가 되고 싶다”는 책을 썼다가 어려움을 겪었던 기억이 난다. 왜 문제였을까? 예술가가 예술적인 말을 한 것뿐인데.
어느 연세대 교수는 야한 여자가 좋다는 글을 썼다가 교수직에서 쫓겨나고 결국 자살했다.
나도 사람들과 부대끼고 방해받고 싶다는 글을 쓴다면, 혹시 어떤 필화를 겪을까 두려운 것일까?
서갑숙과 마광수가 떠오른 이유도 그것이다. 터무니없는 두려움이다.
쓰고 나니 알겠다. 공격할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을.
내가 원해서 만든 환경과 삶을 내가 벗어나고 싶다고 말하면, 그걸 허락하지 않는 내 자신.
포르노 배우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나, 야한 여자가 좋다고 말한 교수와 구조는 다르지 않다.
차이는 나의 인지도와 욕망의 크기뿐.
배부른 소리 하지 말라.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오르고 싶다는 소리 하지 말라.
너의 본능적 욕구를 유명세에 담아 표현하지 말라는 대중의 준엄함.
결국, 그들이 매장당하는 이유는 모두 공동 욕구를 드러냈기 때문일 것이다.
모두 훔치고 싶고, 사랑받고 싶고, 베풀고 싶지만, 함부로 드러내면 안 되는 것들을 드러내도 되는 것들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으면 안 되는 것.
그것을 질서라고 말한다.
질서를 지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