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의 체취는 뚜렷한데.
어제 제주시 노인 복지관에 다녀왔다.
건물은 크고 주차장도 넓지만, 건물 안은 텅텅 비어 있고, 컴컴한 실내와 어두운 바닥과 오래된 시설은
묵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분명히 ‘노인 복지회관’이라고 이름은 붙어 있지만, 회관만 있고 복지는 없는 느낌이었다.
그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몸이 긴장됐다.
공간이 나를 잡아먹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천천히 걷는 동안, 그곳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과 표정도 대충 떠올려졌다.
무심히 지나가는 발걸음 속에도, 나는 이미 공간의 시간을 읽고 있었다.
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그렇지만 교회나 요가 학원, 카페에 나가도 내가 원하는 종류의 교류는 생기지 않는다.
말 한두 마디, 존재를 인정받는 느낌, 그게 필요할 뿐인데, 대부분의 상호작용은 한쪽이 이야기하고
다른 한쪽은 듣거나 루틴대로 반응하는 패턴이다.
그래서 나는 가끔 카드 대신 종이 돈을 쓴다.
계산원과 손으로 돈을 주고받는 그 과정에서, 잠깐이지만 서로가 존재를 확인한다.
그런 접촉도 완벽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내가 직접 손으로 촉감을 느끼고, 상대가 돈을 받아주는 순간 잠깐 주의가 나에게 닿는다는
사실이 소중하다. 그럼에도 허전함은 가시지 않는다.
나는 혼자 살고 있고, 집안에서 나와 함께 존재하는 사람이 없다.
단골 관계도 잘 맺히지 않고, 인간적인 교류는 제한적이다.
그런 상황에서, 몸은 자연스럽게 결핍을 감지하고, 적적함은 늘 따라온다.
그럼에도 나는 찾는다. 사람의 온기, 편안하게 존재할 수 있는 순간, 얇지만 살아 있는 연결.
그런 만남은 드물고, 만나자고 쉽게 청할 수도 없다.
상대에게 부담이 될까 봐, 혹은 내가 바라는 순간을 맞추기 어렵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나는 영화관에 간다.
모두 제각각 앉아 있지만, 같은 공기를 마시고 같은 빛을 쬐는 순간, 허전함이 조금 덜해진다.
한편으로는 여전히 외로움이 남지만, 그것도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다.
그리고 나는 글을 쓴다.
카페에 앉아도, 집에 있어도, 몸과 마음의 감각을 따라 글을 써 내려간다.
지금 여기, 내 존재를 확인하는 행위다. 종이 돈처럼, 글쓰기처럼, 영화관처럼,
작은 접촉과 감각이 나를 살아있게 한다.
어쩌면 수일 내로 이 허전함의 정체를 알아낼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