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무게중심

상대에게 맞춘다는 의미

by 정오의 햇빛

누군가의 행동이 마땅치 않기 시작할 때가 있다.
사소한 말투가 거슬리고, 작은 행동이 마음에 걸린다.
불평이 입 밖으로 나오기 직전의 순간. 예전에는 그런 마음이 들면 단순히 이렇게 생각했다.

저 사람의 행동이 잘못된 것이라고.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순간은 어쩌면 다른 의미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우리가 가까워졌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관계가 멀 때는 상대에게 크게 기대하지 않는다.

그가 어떤 행동을 하든, 내 마음에 큰 파문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가까워지면 상황이 달라진다.
상대의 행동이 내 마음과 맞기를 바라기 시작한다.

그때부터 두 사람의 자아는 조금씩 섞이기 시작한다.

동일시가 시작된 것이리라.


두 사람이 하나의 덩어리가 되려고 하는 움직임.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상대가 내 마음과 같아지기를 바라는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상대를 내 안으로 끌어들이기 시작한다.
그 사람의 자아를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맞는 형태로 흡수하려는 시도다.

만약 두 사람의 힘이 대등하지 않다면 이 관계는 쉽게 종속적인 구조로 흘러간다.

한 사람은 더 강하게 억압하고 다른 한 사람은 결국 그 관계에서 탈출하려 한다.


그 순간 관계는 이미 사라진 것이다.

관계가 가능하려면 두 사람의 자아가 각각의 무게를 가지고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이것을 시소에 비유해 본다.

시소의 양 끝에 두 사람이 앉아 균형을 이룬다.
한쪽이 지나치게 무거우면 균형은 깨진다.

이때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다.

균형을 맞추는 책임은 가벼운 쪽이 아니라 더 무거운 쪽에 있다는 사실이다.

가벼운 쪽은 스스로 무거워질 수 없다.
그러나 무거운 쪽은 조금 몸을 움직일 수 있다.
조금 더 짧은 그네 쪽으로 옮겨 앉을 수도 있다.

그래야 균형이 맞는다.


그렇다면 질문이 하나 남는다.

왜 우리는 이렇게까지 하면서 관계의 균형을 맞추려고 할까.

사실 꼭 그래야 할 이유는 없다.
관계를 유지해야 할 절대적인 이유도 없다.

그래도 어떤 사람들은 그 무게중심을 조심스럽게 맞추며 관계를 이어간다.

아마도 그 이유는 그 과정 속에서 자기 자신을 보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상대에게 느끼는 불평 속에서 내 욕망을 발견하고, 균형을 맞추려는 노력 속에서

내 자아의 크기를 알게 된다.

관계는 결국 타인을 이해하는 일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의 무게를 조금 더 정확하게 알아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나이가 드니 빨아들일 대상도 없고 능력도 없다.

이제 할 수 있는 것은 나무처럼 그 자리에 있는 것 뿐일까?

누군가 찾아오지 않더라도 넓은 그늘을 만드는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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